가끔 독특하지만 마음이 가는 노래를 만날 때가 있다. 그 노래는 아메리카노 같은 노래였다. 음산하게 읊조리는 듯한 그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담배의 맛을 연상케했던 첫 아메리카노처럼 쓰고 텁텁했다. 하지만 그 노래는 원두의 잔향처럼 미묘한 중독성을 가졌고, 그렇게 커피의 쓴 맛처럼 음산함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는 비에 대한 태도 변화와 비슷했다. 비 맞기를 피하다가 지쳐, 빗속을 걷기로 작정한 후의 자유로움처럼 젖어드는 불안을 해방시키며 비와 감정은 지나쳐 가는 것임을 자각했다.
노래는 사적인 독백의 기록이다. 화자와 청자는 시간을 두고 존재한다. 화자가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썼으며, 그것은 뒤늦게서야 듣는 이가 전달하면서 노래는 완성된다. 그리고 그 전달자를 통해 들을 수 있는 노래가 된다. 그 사실 자체로 노래는 위로가 된다. 사적인 독백일지라도 시간이 지나 청자를 만난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또한 누군가 들어줄만한 이야기가 된다.
다만 감정 그 자체로써는 노래가 되지 않는다. 노래에는 스스로의 감정을 의식적으로 해석해내는 화자가 있다. 노래 한 곡은 감정이 해석되는 처음과 끝을 통해, 몰입된 감정의 늪에서 빠져나오게 하기도, 머물어도 괜찮게끔 한다. 화자는 어떠한 정서에 대해 기록을 전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청자의 잡념을 멈춰 세운다. 입장을 밝히지 못한 약자의 변호인이 되어, 감정을 미련하게 삼키고 있는 누군가의 등짝을 두드린다. 그때의 노래는 인디밴드 MOT의 '나의 절망을 바라는 당신에게'라는 노래였다.
그 노래의 화자는 누군가가 짓는 웃음에 대해 축하한다는 말로 노래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 웃음은 화자를 조롱하는 비웃음이다. 화자는 그것을 '친절한 경멸'이라 말한다. 화자가 당한 것이 그저 경멸이였으면 상황은 나았을 지 모른다. 누군가를 경멸하는 것은 부도덕이란 책임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일말의 죄책감에 대한 가능성을 암시한다. 하지만 친절한 경멸는 다르다. 친절의 의도는 경멸에 대한 책임을 피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친절한 경멸은 경멸에 대한 지속가능성을 암시한다. 이 노래에는 그 지속가능한 지독함을 온 몸으로 견디려는 화자가 있다.
그날은 직장에서 예상하지 못한 질책을 들은 날이었다. 그의 입에서는 분노와 함께 열등을 상징하는 단어가 나왔다. 그는 망나니가 되기로 한 것 같았다.심판 없이 칼춤을 추는 것 같았고, 그 대상은 애석하게도 나였다. 자리에 돌아와 그 순간을 수없이 되새겼다. 감정은 고조되어 스스로를 삼키기 시작했다. 감정은 열등감과 분노로 시작해, 고립감으로 뻗어나갔고 동료에게 하소연할 생각은커녕 그들조차 타인에게 상처 주는 인간이라는 사실만 떠올랐다. 누군가를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고, 누구도 이런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퇴근 후에도 망나니라는 허수아비를 두고 원수인양 단련했다. 상처 입은 순간을 재현하며 분노의 늪에 빠졌다. 한두 시간을 허우적거리다 겨우 늪에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다시금 열등감이라는 오토바이를 타고 온 분노 뒤에 다시 탔다. 아슬아슬한 속도감에 빠져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달리는 오토바이의 시동을 멈출 비상버튼처럼 생각난 노래가 그 노래였다.
이 노래는 드라마 속 집단 따돌림을 당하던 고등학생의 입으로 불러졌다. 뮤직드라마 몬스타'(2013) 8화에서 집단 괴롭힘을 받던 고등학생 박규동의 슬픔은 최고조에 이르렀고, 괴로운 심정을 담아 교실의 아이들을 향해 이 노래를 불렀다. 박규동은 집단 따돌림 속에서 스스로가 느끼는 절망을 의식적으로 해석해 내며, 그것을 타인이 상상 가능한 절망으로 바꾸기 위해 시도한다.
박규동처럼 글을 쓰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상처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고 썼다. 그리고 열등감에 대한 강연을 찾으며, 반창고가 될만한 말을 구했다. 김창옥 교수는 강연에서 부처님의 말을 전했다.
"삶에서 독화살을 맞을 때가 있다고, 그럼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당연하게 독화살을 빼고 치료를 해줘야 된다고", "하지만 우리는 보통 독화살을 맞으면 어떤 놈이 쐈을지를 생각하고 있다고."
상처를 받았을 때 상처를 준 사람을 계속 생각하는 것은 좋지 않은 방법이었다. 그 사람에게 다음에 어떻게 상처를 되돌려 줄 수 있을지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분노에 빠지고 스스로 허우적거리게 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은 이상 그에게 비슷한 상처를 되돌려 준다면, 그에게 다시 또 상처 입을 각오를 해야 한다. 누군가 말했다.
"훌륭한 사람이란 향나무처럼 자기를 찍은 도끼에게 향을 내뿜는 사람임을, 말다툼은 언제나 두 번째의 성난 말에서 비롯되는 것"(이정우, ‘새벽향기’ 중)이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게 문득 생각났던 오래 전의 그 노래는 그날의 일을 그날에 머물 수 있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