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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자렌지 Mar 11. 2023

소화되지 않는 반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다른 팀 후배에게 질문 하나를 했다가 한 시간째 이야기를 들어주게 되었다. 그는 질문에 대한 답을 미루고 팀 업무의 애로사항을 말했다. 그것은 팀장에 대해 쏟아내는 불만사항이었다. 평소 밝고 여유 있는 그였기에 조금 놀랬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조언을 했는데, 섣부른 조언이었는지 마치 대화는 논쟁을 하는 것처럼 이어졌다.



 그에게는 이상적인 관리자의 상이 분명 존재했다. 그것에 미치지 못한 팀장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가 타인을 강하게 부정하면서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의 인정받지 못한 노력들이 분노가 된 걸까. 혹은 관리자의 단점을 부정하지 않으면,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라 느낀 걸까. 그저 그에게 잘하고 있다고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후배가 그랬던 것처럼 같은 순간을 되뇌는 반추는 분노와 만날 때 주체할 수 없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누군가의 언행에 분노하며 그것을 되뇌는 상태는 사실 그 언행을 학습하는 상태에 가깝다. 누군가를 지독히 싫어할 수록 그들과 거리를 두는 것 같겠지만, 실은 비슷해지게 된다는 말이다. 뇌는 부정의 개념이 없기에, 피하려고 계속 생각하는 것에 부딪히게 되는 논리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할수록 코끼리가 생각나는 것처럼, 슬플 때 울지 말라고 하는 말에 더 눈물이 더 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이유가 아닐까. 잊으려 하면 할 수록 잊을 수 없기에 말이다. '나의 해방일지'의 구 씨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술을 마시는 이유가 그것이다. 구 씨는 눈 뜨면 떠오르는 분노에 대해 말하고, 묵묵히 듣던 연인 미정은 답한다. "어떡하지, 난 알콜릭도 아닌데 왜 당신 말이 너무 이해되지? 잘 자고 일어나서 아침에 이 닦는데, 벌써 머릿속엔 최 팀장 개자식이 들어와 있고, 한수진 미친X도 들어와 있고, 정찬혁 개새X도 들어와 있어. 그냥 자고 일어났는데, 이를 닦는데 화가 나있어."



 마음의 상처들은 화상과도 비슷하다. 사건 이후에는 극도의 아픔이 아니라 소양감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긁지 않고 두면 괜찮아질지도 모르는 가려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자기 전의 어둠 속에서 스멀스멀 간지러운 기억들이 올라온다. 참지 못할 때 계속 긁다가,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살을 파낸다.



 반추는 인생을 매우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상처를 말하지 않고 혼자 끌어안고 있을 때 가장 힘들었다. 특히 스스로의 실수나 잘못이었을 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이 혼자 반추했다. 일기는 "해야 돼, 해야 돼. 하지 말아야 해, 하지 말아야 해." 같은 말로 채워졌다. 무능력하고 무감각한 스스로가 고통이라도 받아서 달라졌으면 했을 때, 벌이라도 내리듯 반추했지만, 전혀 나아진 건 없었다.



 그럴 땐 의지 있는 문장 한 줄에 기대는 습관도 효과가 없었다. 그러다 현재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면 과거와 미래 따위는 없어져버려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반추를 잘하지 않는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어김없이 감당하기 버거운 일은 찾아왔고,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일을 계속 돌이키고 있었다.



 반추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1. 되풀이하는 생각이라는 의미 외에, 2. 한번 삼킨 먹이를 다시 게워 내어 씹는다는 뜻을 갖고 있다. 2개의 의미에서 반추가 고통스러운 이유를 찾는다면, 소화되지 않는 생각을 계속 삼키고 게워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록 속이 문드러질 것이다. 따라서 삼키려던 그것을, 반추하던 그것을 뱉어내야 한다. 과거의 구 씨처럼 혼자 술과 함께 삼키려 하기보다, 과거의 미정처럼 혼자 속에서 불을 내기보다, 종국에 그들이 둘이 만나서 이야기한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당신이 계속 반추하고 있다면 그것을 말할 사람을 분명 찾아야 한다. 그날 후배가 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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