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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밍한 밍 Feb 11. 2024

나의 하늘은 나의 발자국에서부터

밍의 책장 #13, <하늘은 어디에나 있어>

  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 어떤 영문도 알지 못한 채.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이 됐다. 그렇게 한 순간에 떠나버렸다. 엄마가 우리를 떠난 지 십 수년. 언니와 나는 항상 붙어있었고, 삶의 모든 것을 공유한 사이였다. 그러던 존재가 어느 날 부지불식간에 사라졌다.

  나의 삶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가 사라진 그 감정은 나의 삶을 송두리째 집어삼켰다. 아니, 어쩌면 나 스스로가 나를 그 감정으로 꽁꽁 옭아맸다고 말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나는 나의 모든 것들을 그 감정으로 억압하기 시작했다. 내 절친한 친구 사라, 나의 악기 클라리넷, 나의 남아있는 가족, 언니의 남자친구, 새로운 인연까지도.


  종종 행복이 찾아올 때마다 스스로 죄책감을 만들었다. 난 언니를 잃은 '슬픈 사람'이어야 하는데, 과연 내가 이 행복을 느껴도 되는 걸까? 그래, 나는 아직 슬픈 사람이어야만 해. 언니는 경주마라면, 난 그 옆을 졸졸 따라다니는 조랑말에 불과하니까. 그런 조랑말이 자신의 경주마를 잃어버린 이상, 삶의 존재는 무가치한 것이니까.

  경주마와의 추억을 공유하는 존재와 함께 있을 때면, 찰나 무아지경에 빠지기 십상이었다. 그럴 때마다 언니에 대한 큰 죄책감이 휘몰아쳐오곤 했지만, 그럼에도 그건 멈출 수 없었다. 그 존재만이 유일하게 지금 나의 슬픔을 공감해 줄 수 있는 존재의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 존재, 언니의 남자친구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지 말아야 할 사이인 걸 알면서도, 그 거대한 슬픔 앞에 우린 무장해제 될 뻔했다. 실낱같이 남아있던 강한 이성의 끈을 잡아야 하는 상황이 종종 도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찾아오는 거대한 후회와 죄책감. 그 굴레의 반복이었다.


겪어보지 않으면 악기에서도 안 나온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삶에 또 다른 변화를 불러일으킬 트럼펫 주자가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조 폰테인'. 그와 함께 있을 때면 잠시나마 나의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하늘을 만끽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황홀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이것은 내가 처음 겪은 사랑이란 감정이었고, 그 감정이 불러다 주는 행복에 흠뻑 취할 수 있었다. 이러한 행복에 취했을 때, 대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활을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거지?

  하지만 나의 슬픔은 그렇게 호락호락 행복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슬픔 앞에 무장해제된 나의 모습을 본 트럼펫 주자. 나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고, 난 그에게 모든 것을 설명하고 싶었다. 나에게 새로운 하늘이 있음을 알려준 그였기에 더욱 소중했고, 특별한 경험을 안겨다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 난 그를 사랑한다.


  그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그와 함께 있던 숲 속 침대에 시를 한 편 적어 올려놓았다. 내심 확인했으면 하는 마음과 그렇지 않았으면 하는 창피함이 공존했다. 다음날 시를 확인하러 갔을 때, 그것을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바람에 날려갔을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나의 시를 확인한 것은 트럼펫 주자였다.

  더불어 그는 내가 이곳저곳 낙서한 듯 메모해 놓은 모든 쪽지를 하나하나 찾아가며 읽어봤다는 고백을 해왔다. 그 고백의 끝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속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 네 마음이 내 거고."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세상 사람 누구나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살아간다. 저마다의 경중 또한 다툴 수 없다. 같은 경험이라도 저마다 마주하는 감정과 깊이, 평소의 나로 돌아오는 시간은 제각각이다. 이는 기쁜 일이던 슬픈 일이던 분노할 일이던 막론할 것 없이 공통의 맥락을 지니고 있다.


  내 기분 탓일지는 모르겠지만, 유독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그 여운의 파장이 꽤나 길게 남아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든다. 고등학교 때 경험했던 감정도 그랬고, 성인이 돼서도 그랬고, 최근엔 나에게 찾아온 1년 이상의 큰 변화에서도 그랬다.


  주변의 도움이 됐던, 나 스스로가 됐던 그 파장을 버티어 견뎌내고, 다시 일상의 것으로 돌아가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다.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애도하느냐'의 차이는 있겠으나 이것 하나만큼은 모두에게 동일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늘은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하늘은 나의 발치에서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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