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의 책장 #14, <어린 왕자>
10년 넘게 읽고 있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어린 베른하르트에게 헌정하는 책장 뒤에 우리를 반기는 그림이 하나 있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구렁이'. 이 그림을 마주할 때마다 난 항상 설렘에 가득 차곤 했다. 이전까진 그래왔다. 하지만 올해. 그 설렘은 파사삭 식어버리고 말았다. 그와 함께 머리를 스치듯 한 문장.
'드디어 올 것이 왔군.'
그 그림을 보자마자 이건 '모자'라는 생각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 것이다. 내가 그렇게 경계하고 경계했던, 싫어하고 또 싫어했던, 끝끝내 애써 외면하려 했던 그것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어른'
근 몇 주간 계속 이어지는 야근과 야근과 야근 속에 탈곡기마냥 탈탈 지쳐만 가고 있던 나의 모습을 이런 식으로 적나라하게 마주하게 될 줄이야. 예상치 못한 '모자'라는 단어 하나에 나도 어쩔 수 없는 어른임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남은 워킹데이를 항상 계산하며, 담당 프로젝트의 자료를 만들고 피드백받고 수정하기를 수 차례 반복. 주말에도 쉼과 작업을 반복하며 자료를 만들던 지난 3주의 효과가 톡톡히 발휘된 셈이었다.
사실 이번 책의 출판사 번역도 딱딱하긴 매한가지였다. 몇 문장 읽지 않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은 문체임을 알았음에도 이왕에 펼쳤으니 꾸역꾸역 읽어간 것도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모습 아닐까.
작년, 병원에서 마주한 어린 왕자는 '허무맹랑함'이었다. 어린 왕자가 나의 곁에서 온전히 떠나간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이런 허무맹랑함 직후에 찾아온 것이 '나는 더 이상 어린이가 될 수 없는 존재구나.'라는 확인 사실이라니.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를 것을 이렇게 호들갑스럽게 받아들이는 나도 참 유난이구나 싶다.
그리고 하나 더. 아직 난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에도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사람이란 점. 이는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바였고, 이 부분이 흔들림 없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린 왕자가 자기 행성의 장미 한 송이를 특별하게 여기게 된 이유를 알게 된 '과정', 화자와 어린 왕자가 목마름을 달래기 위해 들이켰던 우물 속 한 바가지의 물이 아름다운 선율처럼 느껴진 '과정', 화자가 어린 왕자와의 이별을 추억하게 되는 '과정'.
단순히 '올 해도 어린 왕자를 책 한 권을 다 읽었다!'로 끝난 것이 아닌, 난 아직 어린 왕자를 읽는 '과정'에 집중하고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