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발판과 위안 사이, 그 어딘가에서 #12
길랭바레증후군, 열두 번째 이야기
○ 2022년 10월 둘째 주
병실 침대 높이 정도에선 무릎에 손을 댄 채 일어날 수 있게 됐다.
초기엔 일어나려면 무조건 어딘가를 붙잡고 팔 힘으로 일어났으나, 점차 팔 의존도가 낮아지고 있는 것을 여실히 체감한다.
다만 이것도 5번 정도 반복하면 힘들어서 일어나 지지 않는다. 적은 횟수지만 그래도 되는 게 어디냐며 스스로 위안 삼는다.
보행보조기로 계속 걸음걸이를 연습하고 있다.
팔에 힘이 빠지는 시늉조차 들지 않지만, 얼굴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을 닦아가며 꾸역꾸역 걷는 연습을 한다.
주치의가 회진 중 몇 가지 하반신 동작을 확인한다.
바르게 누운 채로 다리 들어 올리기, 옆으로 누워 다리 들어 올리기, 발등 올리기, 엄지발가락 올리기 등.
바르게 누워 다리 들어 올리기는 얼추 되는 것 같지만, 나머지 동작들은 원하는 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래도 초기 안되던 바르게 누워 다리 올리기는 되니 회복세는 있는 모양이다.
"밍님 오전에 복도 걷고 계시더라구요. 걷는 건 좀 어떠셨어요?"
"팔에 힘이 많이 들어가요. 아직 다리보단 팔로 지탱하는 느낌이 더 커요."
"걸음걸이 지켜봤는데, 왼쪽 엉덩이에 힘이 들어와야 걸을 때 안정감이 생길 거예요."
"아! 선생님. 꼬리뼈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거 같은데, 진통제 이제 안 먹을 수 있나요?"
"아 그러세요. 그러면 진통제는 이제 처방 안 드리도록 할게요. 그래도 혹시나 불편함이 느껴지시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드디어 매일같이 달고 살던 진통제로부터 해방됐다. 꼬박 두 달이 걸렸네.
이제 내 간도 진통제에 의한 부담이 없어지겠지?
매일같이 아침, 밤으로 진통제 먹느라 고생했다 간아.
이제 넌 자유의 간이란다.
배드에 걸터앉아 다리를 붙여 들어 올려본다.
힘든데..? 이거 이렇게 힘든 거였어?
코어의 힘보다 다리 힘이 부족하여 들어 올리는 게 결코 쉽게 느껴지진 않더라.
치료사가 다리를 확인해 보더니 오른쪽 허벅지에도 조금씩 힘이 들어오는 것 같다고 한다.
"자 이제 다리 살짝 벌려보시고 그렇죠. 이제 들어 올려보세요."
"어? 올라가요."
"오~ 밍님 안 될 줄 알고 시켜본 건데 올라가지네요. 자 이제 10개."
"????????????????"
치료실에 비치되어 있는 매우 낮은 발판이 있다. 진짜 낮다.
그 낮은 발판에 한쪽 다리를 올려본다. 단순히 다리를 들어 올리는 것부터가 진심텐션이다.
다리를 턱! 올려놓고 발판 위에 올라가 본다.
발을 올려놨다기엔 민망할 정도로 낮은 높이였지만, 나에겐 태산과 같다.
"선생님, 안 올라가져요."
"아니에요. 할 수 있어요. 자 팔에 힘 빼고."
"팔에 힘이 안 빠져요."
"아니에요. 할 수 있어요. 다리에 힘주시고."
"이게 최대로 준 거예요."
"아니에요. 할 수 있어요. 조금만 쉬었다가 다시."
이게 뭐람.. 혼자 끙끙거려 가며 안간힘을 쓰는데 당최 올라가지 질 않는다.
허벅지에 들어오는 부하가 그 어느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게 느껴진다.
아. 이게 계단 오르는 거구나.
"선생님, 근데 앞으로 내려가는 건 안 하나요?"
"그럼 한 번 해보시겠어요?"
맥없이 툭 떨어지는 다리.
난 분명 힘을 줬다고 생각했는데, 이놈의 다리는 자유낙하운동하는 것 마냥 툭 떨어져 버린다.
양 옆에 있는 테이블을 팔로 지탱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우수수 무너졌을 내 다리.
으휴 이 화상아.
"밍님 방금 해보신 것처럼 지금은 다리 힘이 부족해서 그냥 툭 떨어지는데, 그럼 무릎에 무리가 많이 가게 돼요."
"다리에 오는 충격을 무릎이 고스란히 다 받게 되는 건가요? 지금은 안 아픈걸요."
"그쵸. 잘 알고 계시네요. 지금은 밍님이 젊으셔서 괜찮을 수 있어도 후에 시간이 지나면 아파올 수 있어요. 지금은 무리하는 것보단 안전에 힘써봐요."
"선생님 혹시 좀 더 높은 발판에 올라가 볼 수 있을까요?"
"네, 좋아요!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일반적인 계단높이 정도 되는 발판의 등장.
"자 다리 들어보시고 한번 올라가 볼까요?"
"아 이건 팔에 힘 온전히 써도 안 올라가지네요."
"지금은 다리에 힘이 부족해서 그럴 수 있어요. 그래도 이젠 다리 올리실 때 골반이 쭉 빠지진 않네요. 좋습니다."
"다 훌륭하신 치료사 선생님들 덕분입니다 ^^"
"네..? 어..? 네에.. 감사합니다. 밍님이 잘 따라와 주신 덕분이에요."
FES(기능적 전기 자극 치료)에도 변화가 생겼다. 바로 전기 자극 세기가 낮아졌다는 점.
"오 밍님, 전기 자극 강도가 낮아졌어요."
"오 좋은 건가요?"
"그럼요. 전기 자극이 낮아졌다는 건 그만큼 신경이 돌아오고 있다는 거예요. 신경이 돌아올수록 전기자극에 민감해져서 FES로 주는 전기 자극 강도가 낮아지거든요."
"아유 다 훌륭하신 치료사 선생님들 덕분입니다."
"평소에 치료하시는 거 보면 진짜 열심히 하시던데, 그만큼 밍님이 열심히 치료에 집중하고 계시단 거예요."
휴직계 연장을 결재받았다.
이제 직장을 잃지 않기 위해선 6주 내로 복직을 해야 한다. 진짜 시간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휴직계 서류를 제출하고 현 상황에 대해 팀장님께 간략히 말씀드렸다.
회복이 되고 있긴 있으나 그 속도가 기대했던 바에 비해선 많이 느린 것 같다고.
그래도 목소리를 들으니 건강하게 있는 것 같아 다행이라던 팀장님.
"선임님, 자기 계발서가 좋아요? 돈 관련 책이 좋아요?"
"그럼 전 돈 관련 책이요!"
"자기 계발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싶은데요~?
"돈 관련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게 자기 계발이 아닐까요 헤헤"
그렇게 팀장님과의 짤막한 안부인사(?)가 끝나고 이성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근데 너 막상 이 상태에서 퇴원하더라도 그 긴 출퇴근을 견뎌낼 수 있겠어?"
"흠 그건 그때 내가 어떻게든 하지 않을까?"
"지금 상황에서 드라마틱하게 변할 거 같진 않은데."
"그건 그래. 뭐 지금 생각해 봐야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어떻게든 되겠지. 아니면 강제 이직 해야지 뭐."
"그래. 그때 가면 결론지어지겠지 뭐."
감성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말자! 혹시 알아? 갑자기 훅 좋아질지?"
"응~ 넌 들어가 있어."
대학생 당시 대외활동을 하며 알게 된 친구가 얼굴을 잠깐 보러 오겠다는 연락이 온다.
항상 나에게 많은 귀감과 영감을 주는 고마운 친구.
"밍아 잠깐 들리려는데 혹시 필요한 거 있어?"
"응? 멀리서 오는 걸 텐데 진짜 짧게만 거리 두고 보는 거라... 부담되면 안 와도 괜찮아! 맘만으로도 고맙지."
"괜찮아~ 잠깐 얼굴이라도 보러 갈게. 혹시 필요한 건 있어? 괜찮으니까 부담 없이 얘기해~"
"음.. 그럼 난 책..."
"책??"
"응 네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인생 책."
의외의 답에 조금 당황스러워하는 친구.
그렇게 <하퍼 리 - 앵무새 죽이기>와 <친타오 - 결국 이기는 사마의>를 받게 됐다.
오 읽을 게 또 생겼다 히히. 읽을거리가 풍족한 병원생활.
주말 낮에 들른 친구와 이런저런 근황이야기를 하며, 20분 남짓한 시간이 흘러갔을 무렵.
제삼자의 목소리가 중간에 탁 치고 들어온다.
"이제 그만 이야기 마무리 지어주세요."
원무과 사람의 목소리. 아 시간 너무 짧은데....
이 말을 함과 동시에 지켜보고 있는 그 부담스러운 시선. 업무상 어쩔 수 없이 하는 말이라지만, 원망스러운 맘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더라.
하는 수 없이 순식간에 지나간 짧은 시간을 급마무리하게 됐고, 아직 못다 한 말들을 꾹꾹 삼킨 채 각자의 길로 발걸음을 돌린다.
그리고 그날 카카오 데이터센터 화재로 인해 카톡이 먹통 돼서 사진을 못 받은 건 안 비밀 ^^
팀장님의 <닉 매기올리 - 저스트. 킵. 바잉>과 친구의 <하퍼 리 - 앵무새 죽이기>와 <친타오 - 결국 이기는 사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