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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밍한 밍 Mar 31. 2024

거절과 거절

<자아>

"밍님, 이것 좀 해줄 수 있어요?"

"아.. 넵 알겠습니다."

"업무 많으면 일부러 안 해도 돼~"

"아 괜찮습니다. 지금 건은 곧 마무리돼서 여유가 좀 생깁니다."

"그럼 부탁 좀 할게~"


부탁(이라 쓰고 업무 던지기라고 읽는)에 대한 거절을 어려워한 적이 있었다.
단지 입버릇처럼 붙어있던 '넵.'이 그 첫 번째 이유였고,
무능력해 보이기 싫다는 내면의 압박이 두 번째 이유였다.
마지막으로 같은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니 만큼,
서로 도와야 시너지가 날 것이라는 이유 역시 포함된다.


"오 빠르게 잘해왔는데?! 고생 많았어."


그렇게 던지기 당한 업무를 마무리하고 결과물을 보여준다.
말과는 달리 '으음~'의 눈빛과 갸우뚱의 고갯짓이 돌아오곤 했다.


"밍님, 잘했는데, 내가 조금 더 필요한 거 찾아서 수정했어. 흐름도 조금 바꾸고. 한 번 참고해 봐~"


어렸을 때부터 꽤 오랜 시간 위와 같은 상황이 반복되곤 했다.

부탁에 대한 거절을 으레 나쁜 사람이라 잠정적으로 치부해 버리는 내 내면으로부터의 목소리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밍아 너도 하나 사줄게! 하나 골라봐!"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 하나 골라~"

"아 맘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반면 제안에 대한 거절은 참 잘해왔던 것 같다.

참.. 아이러니한 인간 같으니.

제안에 대한 거절은 사람의 미덕이라고 생각하던 내면의 목소리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던 때였다.


서로 상충되는 두 가지 내면의 목소리들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차츰 그 경계가 희끄무레해지며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밍님, 이것 좀 해줄 수 있어요?"

"당장 마감 일정이 빠듯해서 좀 힘들 거 같습니다.
대신 찾으시는 것에 대한 자료는 ~~한 것들이 있는데,
참고하실 수 있게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보내드릴까요?"

"아 괜찮아요. 그럼 나중에 디자인만 좀 잡아줄 수 있어요?"

"확답은 드리기 좀 어려운데, 혹시 그 시기가 언제쯤일까요?

아니면 색상 참고할 수 있는 사이트 보내드릴게요."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리고 이후의 추가적인 부탁이 이어지진 않았다.


"오늘은 내가 커피 사줄게!"

"......"

"감사히 먹겠습니다!"


무리의 적막을 뚫고 대뜸 꺼내는 나의 한 마디.

그렇게 식사 후 커피를 한 모금 쭉 들이켠다.




어떠한 관계에서든 간에
중심 시선을  '타인'이 아닌 '나'에 대한 것으로 옮겨오며,
거절하는 법을 배우고 또 변화시켜 왔다.

부탁에 대한 무조건적인 승낙 혹은 제안에 대한 거절이 아닌,

부탁에 대한 조건부 거절 혹은 제안에 대한 승낙으로.


한편으론 뻔뻔함과 능글맞음 그 사이의 무언가를 찾아가는 와중일 수도 있겠다.

뻔뻔함이던 능글맞음이던,

타인을 위한 승낙과 거절이 아닌,

나를 위한 거절과 승낙을 시작한 것임에는 틀림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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