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 한글로는 같은 모양새를 띄고 있으나, 어떤 한자를 덧붙이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뜻을 갖는다.
사전에서 공정이란 단어를 검색해 보면 다음과 같은 여러 공정을 찾아볼 수 있다.
① 공정(工程)
- 일이 진척되는 과정이나 정도.
- 한 제품이 완성되기까지 거쳐야 하는 하나하나의 작업 단계
② 공정(公定)
- 관청이나 공공기관에서 정함
- 일반 사회의 공론에 따라 정함
③ 공정(公正)
- 공평하고 올바름
연극 <당선자 없음>은 제헌 헌법이라는 소재를 통해 '공정'에 대한 메시지를 제시하고 있다.
제헌 헌법을 다루는 다큐멘터리의 제작을 맡게 된 박연수 PD(이하 박 PD). 이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라미효 작가(이하 라 작가)와 헌법교수 금윤형 교수(이하 금 교수)에게 연락, 섭외하여 다큐멘터리 제작을 맡는다.
박 PD와 라 작가는 다큐멘터리에 제헌 헌법과 관련된 연극을 송출하고 싶어 하지만, 그들의 상사인 국장은 회사에 논란을 부추긴다는 명분으로 해당 연극을 송출하지 말라는 주장을 강하게 내세운다.
그들의 의견이 대립하는 연극에는 제헌 헌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담겨있다.
이 연극은 일제강점기 당시 총독부에서 일한 사람들(흔히 친일파라 불리는 자)이대한민국 제헌 헌법의 초안을 제시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연극 <당선자 없음>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 ①과 제헌 헌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다룬 극의 에피소드 ②가 서로 교차하며 극이 진행된다.
에피소드 ②의 과정에서 제헌 헌법 1안을 작성하는 등장하는 최상영과 윤길상. 이 둘은 자신들이 친일파로 손가락질당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 스스로가 역사에 나타나선 안된다고 이야기함과 동시에 그들 말고 누가 광복 이후 세워질 대한민국 정부의 기초를 다질 수 있겠냐 말한다. 일제 밑에서 일하며 배운 선진 관료문화를 몸소 체험한 것은 이들이라는 일념하에.
일반 노동자와 사람들이 그러한 문화를 알 턱이 있겠느냐며, 시작부터 엉망진창인 국가를 만들 수는 없다는 그들만의 명분을 강하게 내세운다.
제헌 헌법 초안이 완성될 무렵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완성된 초안을 국회로 대신 제출해 줄 누군가였다.
친일파란 낙인이 찍혀있었기에 그들의 신분을 노출시킬 경우 발생할 위협 요소가 상당했기 때문.
제헌 헌법 제1조 1항을 읊조리며이들은 이야기한다. 국가가 있기에 국민이 있다고.
이익균점권 같은 노동자들의 권리는 이후에 국가가 자리를 잡은 이후에, '나중에' 만들어도 된다고.
그렇다면 이들에게 공정이란 무엇이었을까.
이들에게 공정은 工程과 公定.
제헌 헌법을 만들어가는 과정과 국회에서 제헌 헌법을 정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기득권 계층이었던 이들의 시선에서만 바라본 공정이었다.
※ 이익균점권은 제헌 헌법 18조에 명시되어 있다. 제헌 헌법 18조 근로자의 단결,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의 자유는 법률의 범위 내에서 보장된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법률의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이익의 분배에 균점 할 권리가 있다.
에피소드 ①은 에피소드 ②의 인물들의 신분으로 인해 갈등이 발생한다.
국장은 회사에 논란을 줄 수 있는 건덕지는 방송 송출이 어렵다는 명분을 제시한다.
이러한 명분 위엔 더 위에 있는 사람들의 이권이 연결되어 있었다. 제작하는 다큐멘터리 속 연극(에피소드 ②)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었고, 회사의 대표는 그것이 밖으로 알려지는 것을 숨기고 싶어 한다. 이러한 메시지를 국장에게 전달, 국장은 이를 '회사에 논란을 주는 방송'이라는 명분 하에 해당 내용을 송두리째 도려낼 것을 주문한 셈이다.
국장도 회사 내에선 기득권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이었다.
방송 송출과 방송 예산 편성에 대한 결정권을 갖고 있음과 동시에 윗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자.
이를 잘 보여주는 대사가 등장하기도 한다. 회사가 있기에 그들도 방송을 만들고 송출할 수 있는 것이라고.
국장에게 공정이란 무엇이었을까.
국장에게 공정은 工程과 公定.
에피소드 ②의 인물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국장에게 공정은 방송을 만드는 과정과 회사에서 방송 송출여부를 정하는 것.
박 PD는 다큐멘터리 제작에 처음부터 참여한 인물은 아니었다.
다른 PD가 제작하던 다큐멘터리였으나 신변에 문제가 생겼고, 이후 국장의 거의 완성되었다는 말에 덜컥 제작을 이어받은 인물이다.
이 다큐멘터리의 완성을 위해 라 작가와 금 교수에게 연락하게 된다.
박 PD의 연락으로 다큐멘터리 제작에 다시 참여하게 된 라 작가.
이 둘은 이전 담당 PD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는 가에 중점을 두고 다큐멘터리 제작을 이어간다.
다큐멘터리 제작을 이어가던 중 예산안이 삭감됐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라 작가가 예산안을 삭감했다는 국장에게 전하는 말 한마디.
"이번에도 제 인건비만큼 예산안을 삭감하신 건 아니시죠?"
이에 국장은 직접적인 답변은 회피한 채 에둘러 말하기 바쁘다.
상황을 더 파고 들어가 보니 신변에 문제가 생긴 이전 PD는 다큐멘터리 제작으로 스탭들에게 선지급됐던 돈을 해당 스탭들로부터 직접 환수해 오는 과정을 거쳤고, 이 과정에서 스스로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알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것이었다.
이전 PD가 추구해 온 공정은 工程과 公正이었고, 그의 공정은 기득권층의 公定으로 인해 철저히 짓밟힌 셈이었다.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는 스탭들 모두와 함께 공평하고 올바르게 과정을 만들어가려 했으나, 국장과 회사가 정해버린 예산안 삭감 및 환수조치에 의해 그의 공정은 낱낱이 찢어져 버렸다.
이전 PD의 공정이 찢어버리는 과정엔 금 교수의 말 한마디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밝혀진다. 금 교수는 그저 '세밀하게 살펴봐달라'는 순수한 의도를 국장에게 전달한 것이라 하지만, 그 배경엔 금 교수가 몸 담고 있던 학교 이사장의 언질이 있었고, 그 이사장은 '논란의 소지가 있을 법한' 다큐멘터리 제작 회사의 대표와 동일인물이었던 것.
금 교수는 자신의 말 한마디가 이러한 힘을 가졌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음을 시인한다. 책임을 회피하기 급급해 보이는 국장과는 다소 다른 태도를 보여주며, 자신의 공정은 公正으로 향하는 것임을 피력한다.
금 교수에게 공정이란 무엇일까.
금 교수에게 공정이란 세 가지의 것을 모두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기득권층만의 입장을 대변하는 제스처를 보일 수 있는 자신의 말 한마디를 인정함과 동시에 공평하고 올바름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공정.
다큐멘터리 제작으로 회사 내부가 시끄러운 것과 더불어 외부에선 작가들의 시위가 한창이었다.
함께 회사에서 지내오다, 회사에서 일부 PD만을 정규직으로 변경, 그 외의 작가들은 모두 비정규직으로 내몰았기 때문.
이 사태에 관해 국장은 회사가 어떻게 그들을 모두 정규직화 하고 퇴직금을 줄 수 있냐며, 회사가 있어야 그들도 있는 것 아니냐는 논리를 펼친다. 국장의 공정은 결국 철저한 기득권만의 입장을 대변할 뿐이었다.
반면 라 작가는 그들을 설득해 이번 다큐멘터리에 그들의 목소리를 녹여내 보자 제안한다. 박 PD는 이에 난색을 표하는 듯하나, 끝내 목소리를 담아 온 라 작가의 결과물을 수용한다. 그들이 찾은 이전 PD의 의도, 일부러 논쟁을 일으켜 사람들의 이목을 끌자는 뜻을 내비치기 위함이었다.
라 작가와 박 PD에게 공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의 공정은 세 가지의 공정을 모두 포함시키려는 것이 보였다.
다큐멘터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의 工程, 회사 차원을 넘어 좀 더 넓은, '방송'이라는 콘텐츠를 제작하는데 참여하는 모든 노동자의 결정을 존중하고자 하는 公定, 그리고 모든 노동자가 올바르고 공평하게 권리를 행할 수 있는 公正.
본 연극의 압권은 단연코 극 마무리와 함께 송출된 영상이었다.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과 다양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조금씩 조금씩 이익균점권과 관련된 연설을 읽으며 이를 완성시키는 영상이 송출된다.
에피소드 ①의 국장이 말하는 회사와 에피소드 ②의 인물들이 말하는 제헌 헌법은 정작 노동자라 불리는 계층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공정을 과연 진정한 공정이라 할 수 있을까?
회사가 존속할 수 있는 것은 '노동자'가 있기 때문이고, 국가라는 개념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구성하는 '국민'이 있기 때문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바로 비치는 그런 작품이었다.
그리고 회사와 국가를 구성하는 '노동자'와 '국민'은 당선자가 아니다. 오히려 당선자가 없기에 세 가지의 공정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것이다.
세 가지의 공정이 균형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올바른 회사, 국가의 형태가 존속될 수 있음을.
대한민국은 헌법 제1조 1항에서 2항으로 가는 길이에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 해당 작품은 현재 네이버 TV에서 6월 5일 월요일 오후 6시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