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개봉한 픽사 애니메이션 <엘리멘탈>
개봉한 지 약 두 달이 넘어가는 시점임에도 누적 관객 수 600만 명을 돌파할 정도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작품이다.
필자는 7월 자막으로 한 번, 8월 더빙으로 한 번, 총 두 번 영화관에서 본 작품을 관람하였다.
작품을 두 번 정도 보게 되니, 문득 내가 경험했던 것들과 비슷한 맥락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이 K-장남에서의 시선. 여기선 K-장남의 시선에서 바라본 <엘리멘탈>의 느낀 점을 서술하고자 한다.
전체적인 영화는 장녀 격인 '앰버'를 따라 스토리가 흘러간다.
"이 가게는 네게 물려줄 것이란다. 네가 '준비만 되면.'"
어렸을 때부터 줄곧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라온 '앰버'는, 그녀의 아버지가 한평생 일궈놓은 가게에서 함께 일하며 그 가게를 '물려받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고향 땅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자리 잡기 위해 집안의 '가장'이 일궈놓은 그것을 '장녀'가 마땅히 물려받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맥락이 얼핏 보인다. 더불어 이 가게는 줄곧 자신의 '꿈'이었다는 뜻을 내비치는 그녀의 아버지.
어렸을 때부터 줄곧 들어온 말이었기에 얼핏 세뇌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 어떠한 의구심은 갖지 못한 채, 가업을 이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나 역시 어렸을 때부터 이런 종류의 말을 숱하게 들어왔다.
'훗날 네가 이 집안의 가장이다.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넌 장남이고 우리 집안의 기둥이다.'
뭐 이런 종류의 것들. 덩달아 '양보'와 '참아야 한다'란 키워드를 숱하게 들어왔다. 아니 대체 첫째가 뭐라고? 아무것도 몰랐던 아이는 그저 엄마, 아빠가 하는 말이었기에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아 내가 우리 집안의 가장이고, 기둥이구나.'
앰버는 웨이드를 만나며 내면의 갈등을 겪기 시작한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는 웨이드. 하지만 앰버에겐 그저 배부른 소리에 지나지 않는지, 오히려 그에게 역정을 내고야 만다.
"대체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
웨이드는 앰버의 입장을 십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영영 못할 수 있다. 앰버가 그의 말을 듣고 화를 냈을 때, 자기 가족과 자신은 진심 어린 응원이었고, 그 말에 어떤 문제가 내포되어 있었는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순수한 목적의 응원이었을지언정, 누군가에겐 폭력이 된다.
앰버가 어렸을 때부터 양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책임'을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책임'을 짊어지고 살아온 앰버가, 그녀의 삶 속에서 과연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가 있었을까?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꿈을 찾으라고? 그건 '여유 있는 자'들이나 할 수 있는 '투정'에 불과하다. 그 꿈이 당장의 나를 배불릴 수 있는가? 아니. 섣불리 꿈을 찾아 나섰다간 길거리에 나앉기 일쑤다. 물론 잘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 역시 염두해야 하고, 최악의 경우 지금껏 부모가 이루어놓은 모든 것들이 통으로 날아갈 수 있다. 바로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모든 것이 엉망이 됐다는 생각만으로도, 내가 누군가의 '짐 덩어리'일 수 있단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더욱 위축시킨다.
그럼 이걸 밖으로 이야기하면 되는 것 아니냐? 아니. 이 역시 '여유 있는 자'들이나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왜냐? 난 '집안의 기둥'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져가야 할 것은 '희생'이다. 그리고 그 희생은 '당연한' 것이다. 당연한 게 어디 있냐고? 난 첫째이기 때문이다. 난 '책임감'을 가지고 장차 '집안'을 이끌어가야 하는 '미래의 가장'이기 때문이다.
"네가 나의 꿈이란다."
극이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무렵, 앰버는 자신의 부모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다.
"가게는 내 꿈이 아니야. 네가 나의 꿈이란다. 앰버."
어쩌면 앰버가 지금껏 살아오며 짊어지고 있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한 마디였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앰버는 부모가 일궈온 가업을 이어받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그들이 일궈온 것을 '망치지 않은 채' 더 잘 해내고 싶었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희생'해가며, 좋아하는 것을 외면 아니 포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생각은 그녀 만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부모와 앰버는 사실 서로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몰랐고, 그로 인한 서투름으로 인해 서로 오해하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이루고 싶은 꿈이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으나, 표현해야 하는 방법을 몰라서 혹은 그들이 실망할 것 같다는 '염려' 때문에 스스로를 '희생'이라는 공간에 가둬둔 것은 아니었을까.
표현을 못 한다고 하여 애써 꽁꽁 숨겨두지 말자. 어쩌면 상호 의사표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서툴러서 발생하는 오해일 수도 있다. 이를 염두하되, 나를 '희생'의 제물로 삼진 말았으면 좋겠다.
이 세상 모든 K-장남/장녀를 응원한다.
'나'는 '나'이다. 누구도 '나의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