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2016년 1학기 <물리학의 개념과 역사>(정확하진 않다)라는 전공 수업을 수강하고 있었다. 전공 수업의 개인 과제로 물리학자를 한 명씩 선정, 그의 생애와 업적을 15분 이내로 발표해야 했다. 누구를 주제로 선정할까 고민하던 중 문득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단어가 떠올랐고,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를 발표 주제로 삼으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너무 많은 내용을 담으려는 욕심에 발표는 거하게 국수 한 사발 뚝딱 말아먹었지만, 그로부터 7년 뒤 이젠 극장에서 반가운 이름을 보게 됐다.
바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가 바로 그것이다.
개봉 당일날 해당 영화를 보고 왔다. 러닝타임은 3시간.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나에겐 무척이나 짧게 느껴졌다. 영화를 관람하기 전 주의해야 할 사항이 한 가지 있다면, <인셉션>, <인터스텔라> 등 눈이 즐겁고 화려한 놀란 감독의 영화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겐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영화 <오펜하이머>에 즐겁게 몰입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생애를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비록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으나, 발표 준비를 한답시고 열심히 '오펜하이머'의 생애를 들여다봐서 그런지 뇌에 잔존 기억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 덕분에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생애를 추적하는 과정이 그렇게 재미있더라.
1. 영화에 등장하는 많고 많은 물리학자들
- 이 영화의 묘미라고 할 수 있다. 닐스 보어, 하이젠베르크, 한스 베테, 리처드 파인만, 엔리코 페르미, 알버트 아인슈타인, 에드워드 텔러 등등 다양한 물리학자들이 묘사된다. 한 명 한 명 그들을 연기한 배우들을 보며 물리학자들을 추론하고, 맞추는 재미가 쏠쏠했다. 덩달아 그들의 대사에서 나타나는 물리학과 관련된 지식을 듣는 재미 역시 쏠쏠했다. 그치그치 그게 그거지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는 나.
더불어 깨알 같은 디테일들이 스며들어있는 것을 찾아보는 재미 역시 쏠쏠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에게 양자역학과 관련된 논쟁에서 이겼던 일화를 한두 마디의 짧은 대사로 쓱 스쳐 지나가듯 묘사한 것, 파인만이 봉고를 연주하는 것 등 물리학자의 특징들이 영화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
2. 배우의 연기와 놀란 감독의 연출
- 로스앨러모스에서 맨해튼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일 때, 트리니티 실험에서 플루토늄을 활용한 폭탄이 성공적으로 터지며, 이를 전후로 핵폭탄에 대한 오펜하이머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묘사하는 배우의 연기력에 흠뻑 젖을 수 있었다.
트리니티 실험에서 폭탄이 터진 후 일정 시간이 흐른 뒤에 흘러나오는 폭발음은 가히 거대하다. 고요한 적막이 흐르다가 쾅! 울리는 폭발음에 주변에선 흠칫 놀라는 제스처들을 여럿 볼 수 있었으나, 난 크게 놀라진 않았다. 어쩌면 이게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기 때문. 공기가 매질인 곳에서 소리는 빛보다 속력이 한참 느리기에 약간의 시간차가 적용될 수밖에 없다.(천둥번개도 이와 유사하다.) 이런 디테일을 그대로 표현했다는 데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더불어 흑백과 컬러의 연출을 오가며 영화가 진행된다. 이게 가히 압권이다. 오펜하이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오펜하이머와 제삼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오펜하이머의 극명한 대립을 바라볼 수 있다. 흑백과 컬러가 대조를 이루며, 단순히 대조를 이루는 연출로 끝나는 것이 아닌, 대립되는 두 가지 시선에서의 서로 다른 해석을 바라보는 것 역시 영화에 신선함을 더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이 영화가 딱 그런 영화이다.
수없이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나에겐 큰 재미로 다가왔으나, 누군가에겐 너무 다양한 인물이 나와서 몰입력을 흐트러뜨릴 수 있는 장치가 될 수 있다. 킬링타임용 영화는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그저 유명한 영화니까 재밌겠거니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영화를 관람한다면.. 러닝타임 3시간이 다소 지루함으로 가득 찰 수도 있다. 특히 마지막 약 1/4 지점은 더더욱.
섣불리 영화를 보러 가라고 주변에 추천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닌 것 같다.
단지 난 '오펜하이머'라는 인물과 당시 물리학의 시대상 흐름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3시간이 아쉬울 정도로 깊이 몰입할 수 있었다.
아.. 난 이건 사전배경까지 공부하고 가고 싶진 않은데 꼭 보고 싶다 하는 사람들에겐 이 한마디를 건네주고 싶다. '사건' 중심이 아닌 오펜하이머라는 '인물' 그 자체에 중점을 두고 영화를 관람한다면, 그의 심리적 흐름을 추적하는 데 상당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