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의 책장 #9, <재치 넘치는 시골 양반 라만차의 돈키호테>
병원 생활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무렵, 머릿속에 돈키호테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어렸을 때 조금 자그마한 한 권짜리 책으로 접했던 어렴풋한 기억. 그 기억을 좀 더 선명하게 각인시키고 싶다는 생각. 이 생각을 한 나를 뜯어말려야 했다. 1,2권으로 분권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 나의 머릿속엔 의아함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상.. 하다...? 내 기억 속의 돈키호테는 300쪽 남짓 A5 크기 정도의 책이었는데..? 심지어 1권이 아닌, 2권으로 분권 되어 있잖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약간의 혼란을 뒤로한 채 어쨌든 이왕 읽기로 맘먹었으니 곧장 실행에 옮긴다.
돈키호테는 2권으로 분권 되어 있고, 심지어 2권의 분량이 좀 더 많다. 한 100페이지 정도? 머리말을 보아하니, 세르반테스가 1권을 출판한 뒤 10년이 지난 시점에 2권을 다시 집필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1권 완독 후 다른 것들을 잠시 보다 2권을 다시 읽기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 집필한 작가의 의도(?)를 따라가 보기로 한다.
라만차의 어느 한 마을에 살고 있던 시골 양반. 기사도에 심취한 그는 재산 일부를 팔아 기사도 책을 구해 밤낮으로 읽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다 문득 기사도 책 속 편력기사가 보여주는 모험의 삶을 직접 실행에 옮기기로 마음먹는다.
편력기사로서의 모험 출정에 앞서 필요한 나름의 것들을 찾아 만들어내기 시작하는 시골 양반. 갑옷과 투구를 손질하고, 칼을 차고, 자신의 말에 '로시난테'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이름을 짓는다. 그렇게 지어진 이름 '돈키호테'. 그리고 편력기사가 열렬히 사랑을 바칠 여인을 생각해 내고, 그녀에게 붙일 근사한 이름으로 '엘 토보소의 둘시네아'라 부르기로 한다. 근처 객줏집에서 엉망진창 나름의 기사 서품식을 치른 뒤, 그의 종자 '산초 판사'와 함께 길을 떠난다.
과거의 '나'가 떠오른다. 바야흐로 중학교 2학년 재학 시절 당시 해리포터 시리즈에 빠져있었다. 해리포터와 불의 잔의 메인을 담당하는 트리위저드 시합. 그중 해리포터가 파르바티 파틸에게 무도회에 같이 가서 춤을 추겠냐 제의, 파르바티 파틸이 제의를 승낙하여 같이 춤을 추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 한껏 심취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혼자 씨익 웃곤 했다.
학교 오전 자율학습 시간에 종종 해리포터 시리즈를 읽는 나를 보며 숙제는 다 했냐고 물어보던 선생님의 질문이 이 흥을 깨뜨리긴 했지만, 다 했다는 대답 이후 곧바로 혼자만의 상상 속 해리포터 세계를 누비던 때가 있었다. 상상으로만 끝나서 망정이지, 진짜 망토를 둘러메고 나뭇가지 하나 주워 들고 마법 주문을 외치고 다녔으면 어땠을까...?
<재치 넘치는 시골양반 라만차의 돈키호테>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1. 돌아다니다가 어느 장소에 도착, 인물을 마주한다.
2. 기사도에 심취한 돈키호테는 객줏집은 성, 그 외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추어 해석하고 오해한다.
3.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다.
상을 동여 메고 가는 사람들을 보며 누군가를 납치해 가는 중인 것으로 착각하여 그 행렬을 방해하기도 하고,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하며 무작정 달려들기도 하고, 객줏집 내부에서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사람들에게 골탕 먹을 땐 마법에 걸린 곳이어서 자신에게 시련이 닥친 것이라 착각한다.
자신만의 편력기사 세계에 심취한 돈키호테. 그에게 객줏집은 곧 성이고, 그곳에 상주하는 여자는 모두 그에겐 공주로 비친다. 거기에 도끼병도 얼마나 심한지, 편력기사의 모험에서 만난 모든 공주들은 못내 자신을 연모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정작 당사자들은 아무런 생각도 없고, 그저 정신 나간 사람으로 밖에 보지 않는다. 그의 말투 역시 기사도의 것을 계승한다는 일념 하에 굉장히 부자연스럽게 다가온다. 미사여구가 굉장히 많고(흡사 꾼들과 비슷하다), 그 때문에 말이 길어져, 책장을 뒤로 넘길수록 점차 지친다.
예를 하나 들면,
"누구를 막론하고 그 신분과 지위를 가릴 것 없이 아름다운 아가씨 마르셀라의 뒤를 쫓아가려는 자가 있다면, 나의 무서운 분노를 살 줄 알아라! 그 아가씨는 이미 명백하고 충분한 말로 그리소스토모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조금도, 아니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과, 앞으로 누가 사랑을 하더라도 그러한 욕망에 마음을 기울일 수 없다는 것을 밝혔다. 그런즉 그녀의 뒤를 쫓아가서는 안 될 일일 뿐만 아니라, 도리에 세상의 모든 사람이 마땅히 존경하고 받들어야 할 것이다. 저렇듯 순결하고 고결한 뜻을 가지고 사는 아가씨란 이 세상에 둘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다.
뿐만 아니라 편력기사에 대한 허영심 역시 하늘을 찌를 듯 높은데, 특히 '기사도 정신'을 비판하는 말을 한마디라도 들을 적엔 그 자리에서 욱!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들이받는다. 급발진의 제왕 그 자체이다. 아! 이 얼마나 호기로운 돈키호테의 성격이로고.
한편으론 앞뒤 가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긁는 표현에 급발진하는 모습을 보며, 그래도 신념 하나만큼은 우직하게 자리 잡고 있는 모습에 실소 섞인 감탄이 종종 나오곤 한다.
기사도에 푹 빠져 미치광이가 된 돈키호테를 보며, 그 원인인 기사도 관련 책을 불태우기 위해 선별하는 작업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이 다소 우스꽝스럽게 묘사된다.
그의 집에 찾아가 기사도 관련 책을 불태우기 위한 선별작업을 신부와 이발사가 함께 진행한다. 그들은 그들이 선별한 것들을 종교 재판에 넘겨 화형을 처하기로 하고 작업을 시작한다. 그냥 몽땅 다 태워버리면 되지 않나 싶었으나, 그 와중에 다양한 책의 내용과 저자를 확인하며 그에 대한 내용을 '자체적으로 판단'한 뒤 화형에 처할 것들을 선별하는 작업이 이어진다.
내용이 재밌다며 책을 추천함과 동시에 화형에 처하지 않고, 혹은 작가가 자신의 친구라며 화형에 처하지 않고, 자신이 읽고 싶은 내용의 것이라며 화형에 처하지 않는 등 뭔가 다소 위선적인 내용을 폴폴 풍기며 책들을 선별한다.
아니 돈키호테가 미쳐버린 원인의 것들을 다 없애버리겠다며.. 결국 그들이 화형에 처하기 위해 둘러보는 책들의 '근본'은 기사도를 다루는 것들임에 변함이 없다. 와중에 사리사욕 챙기기 바쁜 행위들이라니. 작가가 독자들에게 쪼르르 달려와 '얘네들 보세요~ 결국 자기네들 입맛에 맞는 것만 쏙쏙 골라내기 바쁘잖아요~' 라며 일러바치는 기분이 들더라.
그가 살고 있는 마을에선 가장 똑똑한 사람으로 인식되나, 그놈의 '기사도 정신'에 흠뻑 취한 아집 가득한 미치광이로 돌변해 버린 돈키호테. 거기에 더해 다른 사람의 의견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생각에만 갇힌 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오직 '자신의 관점'에서만 생각하려는 그 오만방자함. 끝내 흠씬 두들겨 맞아 달구지에 실려 고향으로 돌아오는 그 씁쓸함이란.
제 아무리 날고 기는 지식인이라 한들, 우물 안의 개구리인 양 행동하면 그가 자신 지식들이란 것은 하등 쓸모없는 무언가로 밖에 변질될 수 없음을 적나라하게 이야기한다.
라만차의 한 마을에선 '가장 똑똑한 사람이었던' 돈키호테. 하지만 그의 편력기사에 대한 강한 열망이 결국 화를 불렀다. 그리고 그가 화를 입을 땐 항상 그가 마주한 이들의 조롱이 뒤따랐다. 간혹 그의 장단에 맞추기 위한 등장인물들도 있었으나, 결국 뒤돌아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를 조롱하긴 매한가지.
호기롭게 자신의 뜻을 펼칠 것이라 했으나 결국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던, 라만차의 마을에서 한 때 가장 똑똑'했던' 돈키호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