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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란치스카 Jun 14. 2024

2020.10.24

장례식을 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장례에 관한 아무런 지식이 없었다. 

양가 부모님도 다 살아계신 터라 장례식장에 조문만 가봤지 직접 장례를 주관해 본 경험이 전무했던 것이다. 그런 내가, 아니 그런 우리 부부가 처음으로 주관해야 할 장례식이 내 아이의 장례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병원 측에서는 서울에서 장례를 진행할 건지, 대구에서 할 건지.. 대구에서 하게 되면 아이를 대구까지 데려갈 방법을 안내해 준다고 했다.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저 아이를 집에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기에 사촌형부께 도움을 요청했다. 형부는 장례식장을 알아놓을 테니 일단 대구로 내려오라고 하셨다.   


병원에서 안내해 준 사설구급차를 타고 늦은 밤 대구에 도착했다. 이송을 도와주신 구급차 기사님이 장례식장으로 바로 가지 말고, 집과 다니던 학교를 잠깐 들르는 게 좋지 않겠냐 하셨다. 신랑도 나도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는데 참 감사했다. 집 앞과 학교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다. 그렇게 오고 싶어 했던 집과 학교... 결국 이렇게 되고 나서야 오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마음 아팠다. 학교 가는 걸 너무 좋아했던 우리 아이...


자정이 가까워져서야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몇몇 가족과 친척들이 미리 와 계셨다. 아이를 안치실에 안치하고, 장례상담을 진행했다. 몰랐던 사실인데, 일반적으로 아이의 장례는 별도의 장례식 없이 안치실에 안치했다가 다음날 바로 발인을 하는 게 대부분이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 같은 경우는 저녁 늦게 도착한 경우라 다음날 발인이 안되고, 이틀 뒤 발인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아이를 이틀 동안 안치실에 둬야 한다는 거다.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도 그렇게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아빠 없이 중환자실에서 5개월을 외롭게 버텼던 아이다. 여기서마저 혼자 두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하루만 장례식을 하기로 했다. 최소한, 그간 아이의 사정을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만 연락을 돌렸다.




2020.10.24


평소에도 인복이 많던 아이였다. 주위엔 언제나 좋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어디서나 사랑받던 아이였다.

그래서인지 코로나 여파로 조용할 줄 알았던 장례식장이 사람들로 북적였다. 복도에는 화환이 가득했다. 많은 분들이 함께 마음 아파하고 슬퍼해주셔서 우리 아이 마지막길이 조금 덜 외로울 것 같아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이렇게 단 하루라도 장례식을 한 것은 참 잘한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례식장을 찾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까운 친척이거나 우리 부부의 지인이었다. 오전에 학교선생님께 아이 소식을 알렸던 터라 담임선생님과 교장선생님도 찾아주셨다. 교장선생님께서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형준이 상황을 전해도 되겠냐 하셔서 정중히 거절했다. 어차피 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니까... 굳이 전교생의 입에 형준이의 이야기가 오르내리는 게 싫었다. 


장례식장을 찾아온 형준이의 유일한 지인은, 평소 형준이와 친하게 지냈던 친구 S였다. 

12살 소년에게 친구의 죽음을 알리는 건 큰 혼란일 수도 있어서 연락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으나 형준이가 많이 보고 싶어 할 것 같아, S의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문자를 보냈다. 형준이 소식을 전하고, 괜찮다면 S가 장례식장에 와 줄 수 있겠냐고. 못 오셔도 이해하니 부담은 안 가지셔도 된다고... 그런데 고맙게도 저녁에 S와 S의 아빠가 함께 장례식장을 찾아주셨다. 이런 부탁을 할 수밖에 없어서 너무 미안했고,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셔서 너무 고마웠다. 형준이가 마지막으로 친구 얼굴을 보고 갈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  




늦은 오후, 입관식을 진행했다.

내가 하게 되는 첫 번째 장례식과 입관식의 주인공이 내 아이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냥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입관실에서 마주한 우리 아이는 병원에서 힘들어하던 모습과 달리 편안한 모습으로 누워있었다. 병원 입원복이 아닌 평소 좋아하던 삼성라이온즈 유니폼을 입고, 금방이라도 일어나 집에 가자고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손을 만져보았다. 따뜻했다. '왜? 안치실에 오랫동안 있었는데 왜 따뜻한 거지? 우리 아이, 안 죽은 거 아냐?'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믿기지 않는 현실 속에서 한 가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건, 더 이상 아이가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보호자도 없이 5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중환자실에 누워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하고... 버텨왔을 아이 생각에, 어쩌면 '이제는 힘들지 않아 다행이다'라는 그 생각만 들었다. 


보낼 수 없지만, 보내고 싶지 않지만... 이젠 보내야 한다.


"형준아, 이젠 아프지 말고 하늘나라에서 신나게 뛰어놀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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