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날씨는 잠깐으로 가늠할 수가 없다. 아침 6시 또는 7시가 되어 바라본 하늘은 찌뿌둥하고 물을 머금은 듯 무거운 색을 하고 있다. 본연의 하늘을 제대로 확인하려면 적어도 아침 9시쯤을 기점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함부로 오늘의 날씨가 어떻겠다고, 쉬이 예상하면 안 되는 거다.
거리를 걸으면 어쨌거나 사람들과 스쳐간다. 일부러 바라보지 않아도 상대방의 동선을 살펴야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니 스치듯 시선을 던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은 두 눈만 드러나 있어서 많은 감정을 읽을 수는 없지만 의외로 눈은 아주 많은 말을 입술 대신해주고 있다. 편안한지, 우울한지, 두려운지, 화가 났는지 처럼 다양한 감정들이 눈동자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감정과 기분이란 건 투사로써 바라보게 하는 독특한 기능이 있어서 오해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 나의 기분이 좋으면 상대도 괜찮아 보이고 내가 우울하면 상대도 그렇게 보이는 식이다. 때로는 질투나 시기처럼 별로 유쾌하지 못한 감정을 재생산해놓기도 한다.
'내 눈에' 행복해 보이는 저 타인으로 살아보면 어떨까. 아니면 '내 눈에' 우울해 보이는 저 타인으로 살아 본다면? 나는 현재의 나보다 더 나아질까, 더 가라앉을까. 타인으로 살아 보고 싶은 욕구는 만족의 결핍이거나 감정으로써의 결핍에서 기인한 경우가 많다.
모두가 행복한 것도 없고 모두가 불행한 것도 없다. 반반의 확률로 살면 행복이 드러나는 것이고 어느 쪽이든 넘치거나 부족하면 만족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행복이 넘쳐도 행복에 무감각해져 공허해진다고 한다. 나도 사람이지만, 왜 이리 상대하기가 힘든 건지 모르겠다.
타인으로 살아도 마음이 괜찮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거구나. 새삼스런 깨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