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 이연
로맨스에 관한 환상은 아주 컸다. 사춘기가 한창 진행되던 고등학생 시절, 버스를 타고 등 하교를 하는 일이 무척 설렜다. 그땐 학교로 가는 버스가 많이 있지도 않았고 내가 타야 하는 버스엔 유난히 사람도 많았다. 학군이 몰려 있으니 평일엔 대부분 모든 교통수단에서 폭주가 일어났다. 버스정류장마다 학생들은 물밀듯 밀려들었고 대중교통은 셔틀버스가 됐다. 사람들로 꽉 찬 버스가 급정거를 한다거나 갑자기 바뀐 신호에 급출발을 하게 될 때마다 사람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쏠렸다. 가야 할 길은 아직 먼데 그렇게 한바탕 휘몰아치는 상황을 맞보고 나면 삶아진 콩나물처럼 몸뚱이는 흐물거렸다.
내가 탄 버스에 늘 똑같은 시간이었다. 근처 남고 어느 학교 교복을 입은 남학생, 버스를 탈 때마다 , 자리가 많음에서 불구하고 나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꼭 같이 서서 창밖을 바로 보던 어느 학교의 누구였다. 나는 친구인지 오빠인지 알 수 없는 환상 속의 그와 풋풋하고 싱그럽게, 사과처럼 새콤달콤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로맨스에 진심이었던 나는 내가 호감이 가는 사람과 꼭 연애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이란 게 그렇게 쉽게 찾아오는가.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굴러 들어올 거라던 어른들의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 마음속에 뱀처럼 꽈리를 틀고 앉아 있는 두려움과 싸워 이겨야 했고 용기를 내어 행동으로 표현하는 엄청난 일을 한 후에야 사랑이라는 감정을 겨우 느껴볼 수가 있었다.
내 사랑의 시작은 설렘이었지만 마지막은 슬픔이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사랑이란 건 무수히 많은 조건과 마음의 조율이 잘 맞아야 하는 것, 어쩌면 사랑을 이뤄내는 것보다 전교 10등 안에 드는 일이 훨씬 더 쉬운 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20대의 나는 알지 못했다.
오랫동안 저장해 놓았다가 지워버린 그의 번호. 연락할 마음은 추호도 없으면서 나는 종종 그의 안부가 궁금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소식을 그렇게 과시하듯 퍼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잘 지내도 늘 똑같은 문구와 이미지로 살았어, 죽었어할 사람이었다. 내가 먼저 안부를 묻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히 안녕이라는 인사 한마디조차 나눌 수가 없는 먼 사이가 됐지만 나는 이렇게 영원히 남은 추억을 꺼내 보면서 오래된 낭만을 여백에 끄적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