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조건

by 새벽뜰
그림. 이연



스무 살이 넘어가기 시작하면서 남사친 여사친 사이에 발생하는 피곤한 썸이 아니라 아침에 함께 눈뜨고, 부스스한 머리카락도, 눈곱 낀 두 눈도 부끄럽지 않게 마주 바라보며 빙그레 웃을 수 있는 그런 진득한 사랑을 하고 싶었다. 생각만큼 쉽지 않았던 게 나는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를 지독히 원하는 사람이었다. 드라마나 영화가 아닌 , 현실과 일상에서 연애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람과 잘 될 확률은 잘 없었다. 외모에 환상을 가져 친분을 쌓아도 '아, 잘난 것들은 역시 인물값 하는구나' 했고 '물도 좋고 산도 좋은 곳이 어딨겠어. 성격이 거의 AI 로봇 수준이네' 했다. 그렇게 실패를 거듭하다 철이란 단어가 연애 마음에 스며들기 시작하면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을 찾게 되고 사랑을 주는 자상한 사람을 찾아 고군분투하게 되는 거다.

계란 한 판 된 나이를 지나면서 결혼에 대한 환상과 조바심이 동시에 생겼다. 누군가의 개입으로 잘된 적은 거의 없었다. 나름대로 연애 추구 지향점을 잘 실행에 옮겼기 때문일까. 몇 번의 고백을 해 본 적도 있고 몇 번의 고백을 받아 본 적도 있다. 고백을 했을 땐 내 사랑의 결말이 궁금했기에 용기를 냈고 고백을 받았을 땐 어떡하면 잘 거절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한마디로 나는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행위가 겁났다. 처음으로, 아버지 회사 지인분의 권유로 맞선이란 걸 보게 됐다. 나도 맞선이란 걸 보게 되는구나 싶어 마음은 사실 마냥 유쾌했었다. 우울함은 전혀 없었던 게 신기할 정도로 나는 재밌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모르는 번호로 문자 한 통이 왔다. 다행히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라 급하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간략한 자기소개 글이었고 나와 맞선을 보기로 한, 맞선남이었다. 몇 글자 되지 않는 짤막한 글이었지만 나는 느낄 수가 있었다. 이 사람은 많이 긴장하고 있구나. 연애경험이 많지 않을 것 같네. 지긋이 바라보며 생각했다. 희한한 마음이 됐다. 이 사람에게 잘해줘야겠다. 그와 처음 만난 날은 12월 24일이었다. 거리에 사람은 미어터지고 괜찮은 식당이라면 어디든 예약을 해놓아야 식사가 가능했다. 그의 첫인상은 키가 참 크다는 거였다. 여자치고 큰 편인 나도 그날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 얼굴을 들어 그를 봐야 했다. 퓨전 레스토랑으로 나를 데려간 그는 많이 당황한 것 같았다. 이미 예약이 다 차서 줄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었으니까. 그가 식당 점원에게 연락처를 남기고 돌아서며 미안한 듯 말했다. '어떡하죠, 다른 데를 알아볼 걸 그랬나 봐요.' 모든 건 지나면 추억이 될 일이고 그날은 때마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나는 괜찮으니 잠깐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직관대로 따뜻한 사람이었고 착한 사람이었다. 대화는 중요한 거였다. 글보다 선명한 인상을 주는 게 말이었다. 그와 나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남자와 결혼은 하게 되지 않겠구나. 그때의 판단은 섣부른 것이었지만 인연이 오래 닿아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여자에겐 직감이라는 신기한 영적 능력이 있다. 어느 날 집 앞으로 빵과 선물을 들고 그가 왔다.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고 그를 마중하며 돌아와 내용물을 본 나는 적잖이 놀랐다. 내 이름과 첫 만남의 날짜가 정갈하게 새겨진 명품 펜이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바라보며 침대 끄트머리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왜 나는 그에게 온전히 마음을 열지 못했던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리고 일 년쯤 후, 나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가 준 펜은 쓰지도 못하고 그냥 버렸던 건 남편에게 미안해서였을까. 단순히 양심의 가책 때문에서였을까. 결혼 후, 부모님으로부터 우연히 듣게 된 그의 소식은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는 세상의 모든 불행을 짊어진 사람처럼 힘든 일이 많았다고 했다. 그 말이 사실이었을까 의심할 만큼. 부모님은 그와 결혼하지 않은 나를 다행이라 여기셨다. 그런 생각은 당연하다 받아들였다. 부모의 마음은 다 그런 거니까. 그의 불행에 나의 지분은 없었지만 그의 불행에 내가 위로되어주지 못했다는 것에 일말의 죄책감은 있었다. 나를 많이 좋아해 주었던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이 교만한 것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나의 마음이 인간적인 도리라고 생각했다.


인연이 뭘까, 누군가와는 사랑이 하고 싶고 누군가와는 아는 사람 정도로만 지내고 싶다. 외모만으로 가능하지 않고 대화만으로도 허락될 수 없는 인연의 조건. 까탈스럽고 유별난 인연의 조건이 세 살 어린아이 마음보다 더 헤아리기가 어려운 건 진실이었다.


마음으로만 빌어 닿을 수 없지만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그의 행복을 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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