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순서

by 새벽뜰
그림. 이연


만나고, 사랑을 하고, 추억을 쌓았다. 그와 내가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어떻게 서로를 그렇게 또렷하게 알아볼 수 있었는지. 친숙함이 부족한 상대에게 느껴지는 특유의 어색함이나 서먹함 같은 건 그와 나 사이에 없었다. 차라리 이민 가 산다던 절친했던 친구를 몇 년 만에 다시 만났던 만큼이나 반갑고 좋기만 했다. 그와 나의 감정에 이름을 붙이자면 그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냥 사랑이었다. 물론 그렇게 간도 쓸개도 다 줄 듯하다가도 감정이 격앙되어 서로의 한계점에 다다르는 말들이 점점 차오르게 되면 그와 나도 싸움이란 걸 했다. 내가 잘못했어도 사과는 천천히 했던 것 같고 할 수 있는 만큼 버텨보자는 심정으로 메시지 한 통 보내지 않았던 것 같다. 결국 , 그런 후 먼저 손을 내미는 건 대부분 그였고 그래서 결국, 내가 듣게 된 한마디가 아직도 종종 마음에 떠오를 때가 있다. 어떤 책을 읽다가 혹은 어떤 음악을 듣다가.


"넌, 나 사랑은 하니?"


설령 흠뻑 사랑하진 않더라도 끝내지 않기 위한 노력과 상대방의 배려와 선심에 감동을 받았으면 적어도 이렇게는 말을 했어야 했다.


"우리가 싸워서 아직 감정은 다 괜찮지 않지만, 그래도, 사랑은, 해."


20대의 나는 별 잘난것도 없었으면서 잘난 척만 겁나 하며 지낸 것 같다. 그냥 그런 시간들이 나에게도 있었다. 사랑을 받고 자란 나무가 물을 주어 가꿔주고 돌봐준 고마운 사람을 잊고 저 혼자 푸르게 푸르게 자란 마냥 건방을 떤 것도 같다. 당신의 사랑이 자양분이 되어 내가 이렇게 아름다워졌습니다. 감사하지는 못할 판국에 말이다.


사랑한 기억은 많다. 하지만 그와 내가 왜 이별했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어쩌면 이렇게 헤어짐에 관한 기억이 제로가 될 수가 있는 걸까. 그와 내가 오랜 후에 어렵지 않게 재회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헤어짐의 이유가 말도 안 되는 상처투성이 억측은 아니었기 때문일 거다. 얼굴을 다시 마주 보고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가장 사랑했던 순간 클라이맥스처럼 싱그럽게 대화를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납득을 했고 받아들였고 수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약간의 성숙함 덕분이라고. 여전히 첫차와 막차를 택한 나였고 그와 나는 그렇게 다시 사랑한 연인으로 돌아간 듯 보였다. 적어도 그는 우리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하고 있었다. 내가 상대를 사랑했던 시간에도 그랬듯 한때 사랑했던 남자와 보내는 시간도 쏜살같이 흘러가는 건 똑같았다. 이 마음을 대체 누구에게 설명해달라 할 거냐고. 마지막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머물러 있던 그와 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시간이었으니까. 그가 어떤 말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와 헤어진 몇 년이란 시간 동안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들어버린 말 같은 것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알아채는 능력이 나에게 생긴 것 같았다. 안녕이라고 했던가 잘 가라고 했던가 그 말을 남기며 버스를 타려는 내 뒤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어?"


바로 "어"라고 대답해 버리면 나는 양아치가 되는 거고 로맨틱 드라마를 시트콤으로 만들어 버린 막장 배우가 되는 거였다. 미소 띤 얼굴, 눈엔 그렁그렁함이 차오른 상대를 덤덤히 바라보아야 하는 일이 마음을 힘들게 하는 일이란 걸 처음 알았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한 가지뿐이었다.


"잘 지내, 건강하고."


돌려준 건, 미소밖에 없었다.

버스에 몸을 싣고 차는 출발했다. 이미 모든 건 지나갔고 설렘은 아쉬움으로 남아서 완벽한 이별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한참을 달린 버스가 어느 사거리 신호에 멈췄을 때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눈만 그렁그렁 하더니 이젠 목소리까지 그렁그렁해져 버린 그였다.


"........ 했고 그래서 나는 많이 힘들었어."


그의 톤이 완벽하진 않았지만 발음이 뭉개지지 않았다. 나는 그의 힘들었어, 하는 말만 아주 오랫동안 기억이 났다. 모든 말을 들었는데도 기억하는 말은 힘들었어가 전부였다.


그와 헤어진 후 몇 년이란 시간이 나에게 많은 능력을 갖게 도운 것 같았다. 우리가 미래를 함께 한다면 내 모든 건 여기에 두고 당신에게로 가야겠지. 우리가 애정이라 부르며 싸우던 애교 섞인 모든 말들은 곧 진실로 상처가 되어 서로를 할퀴겠지. 이해는 하면 되는 거라고 말했던 우리의 다름도 미래를 함께 한다고 생각하면 현실이 되어 불꽃이 튀겠지. 연애를 할 때 감수했던 무게는 결혼에 비하면 너무나 가벼운 것이었겠지 하며 자꾸 내가 내편을 들었다. 환상을 버리고 현실을 보려 하는 눈이 몇 년 사이 만들어진 것이다.


내가 그에게 조금 더 다정했다면 어땠을까. 내가 더 큰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무 힘도 없는 어땠을까의 반복이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날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면 그와 나는 사랑으로 맺어질 사람들은 아니었던 거다.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진실은 언제나 불편한 구석이 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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