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연
난 결코 연애를 많이 해 본 타입이 아니다. 대게 보면 연애의 시작은 소개팅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만나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썸이나 밀고 당기기 수준에 그칠 뿐이었다. 지인들은 누군가를 나에게 소개해주기 부담스러워했다. 되면 좋고 안되면 말고 이렇게 소탈하고 쿨한 연애가 나랑은 맞지 않다는 걸 알았기 때문 탓도 있었을 거다. 그래도 다행인 게 한 번 만나면 좀 오래 만나는 타입이었다는 건데 그래서인지 연애하면서 당연시 만들어지는 사소한 기억이나 무심히 흘러갈 법도 한 사건들도 너무 분명하게 머릿속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일부러 꺼내보는 일 따위 이젠 할 이유도 없고 할 필요도 없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낡고 빛바랜 사진처럼 이따금씩 꺼내보게 되는 건, 아마도 추억이라 쓰고 시간에 대한 미련이라고 읽는 허세 가득한 핑계가 더해져서 일거다.
그와의 만남을 떠올리면 , 내 기억 속에서 딱 한 가지, 극도로 유치해서 웃음이 나는 일화가 있다. 엄밀히 말하면 상대에겐 슬픈 기억이고 나는 철이 없어 배려하지 못했던 아쉬운 장면일 수도 있지만. 당시 그의 상황이 그리 좋지 못했었기 때문에 부각된 깊이가 더 했던 게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우리는 장거리 연애였고 생각만큼 많이 만나지 못했던 건 정말 어찌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한 달을 통틀어 만난 횟수를 손으로 꼽아도 다섯 손가락이 부족하지 않았으니까. 아침 일찍 차를 타고 그가 있는 곳으로 가면 그날의 막차를 타고 다시 집으로 가던 내 여정도 정말 대단한 거였다. 추억하니 그런 불같은 열정은 대체 어디서부터 발생이 됐고 만들어졌을까. 그를 향한 내 마음은 열정 만수르 같았다. 그날, 그렇게 또 열정 만수르 상태로 만나게 됐던 그날 저녁, 그는 나에게 붉은색 장미꽃을 딱 한 송이만 사다 주었다. 번듯한 시내 어디 아름다운 꽃집에서가 아니라 시내 거리 한 모퉁이에 세워져 있던 하얀색 트럭에서 팔던 장미꽃을 말이다. 트럭이었어도 꽃시장 한편을 보는 것처럼 꽃들의 양이 그득하기는 했다. 여러 가지 장미꽃이 있었던 기억이 있는데 유독 붉은색 장미만 선명했던 것 같다.
장미는 한 송이만 사다 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스물네 살의 내가 서글펐던 건 장미꽃 한 송이라는 것에 대한 물질적인 실망은 아니었다. 그의 반응이었고 그의 태도였으며 그의 말투였다. 더 싫었던 건 바로 , 나의 마음이었고. 그가 꽃 고르는 모습을 꽤 오래 봤던 난 궁금했다. 분명 꽃을 한 아름 포장하려던 손이었는데 시간이 꽤 지체가 됐던 것 같은데 왜 마지막 선택은 달랑 한 송이었을까, 이유를 어느 정도 가늠은 하고 있었으므로 담담하려고 했었지만 돌아온 그의 대답이 너무 엉뚱하고 유치해서 당황스러웠다. 솔직히 허세를 부리는 모습에 화가 났던 거다.
"딱 한송이니까. 특별해 보이잖아."
자존심이 센 사람이었다. 그래서 솔직할 수가 없었을 테지만 마냥 멋있게만 보이려고 얼토당토않은 말을 궤변처럼 늘어놓는 그에게 이상하게도 나는 열정 만수르에서 열정 시종이 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그의 진실된 마음을 나는 아직까지도 모르고 알 수도 없지만, 내 직감이 틀렸고 오해를 한 것일 가능성도 적지 않지만 내가 바라던 대답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직장을 구하려 하는, 한창 힘든 시절을 보내던 중이었다.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충분히 이해하고는 있었지만 나도 그땐 많이 어렸을 때라 마음의 폭이 넓지는 못했다. 한 송이라 특별하다는 말을 대답으로 듣고 난 후 나는 한송이뿐인 장미가 초라해 보였다. 웃으며 고맙다 받긴 했지만, 하루 종일 그 꽃을 들고 다니면서 행복은 했지만. 왜 그는 쓸데없이 괜한 멋짐과 있는 척으로 자신의 매력을 반감시켜 놓았던 건지.
나의 20대는 그랬다. 진짜로 화려했으면 싶었고 진실로 멋있길 바랐다. 그는 나쁜 게 아니었고 다만 자신을 지키고자 노력한 것이란 걸 알고 있다. 아마도 나쁜 건 내쪽이었지 싶다. 그는 나에게 낭만을 선물해주려 했고 나는 쓸쓸함을 감추려 행복한 척했으니까.
연애에서 남자의 입장과 여자의 입장이 극명히 갈리는 시점은 오게 되어 있다. 나의 무게가 무거워지면 상대방은 자연히 가벼워진다. 그건 꼭 놀이터에 있는 시소 같다. 두 다리를 바닥에 내려놓기 위해 버둥대던 그는 꽤 오랫동안 노력을 감행했던 것 같다. 결국은 일보 전진을 위한 이보 후퇴처럼 멋있게 전화위복을 한 그였지만 한 단계 업그레이드가 된 그의 옆엔 나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운명의 수레바퀴처럼 질긴 인연을 이어갈 인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