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이연
소설을 좋아해 많이 읽던 시간들이 있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세 번 정도를 틈틈이 완독 했던 책은 신경숙 작가의 것이었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특히 이 소설은 내 열아홉 첫사랑을 다시 만난 때로 돌아간 것만큼이나 마음을 설레게 했고 흥분하게 했다.
연애를 할 때는 물론이고 이별 후 일정기간,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으로 성립되는 시간) 아직 연애의 감정이 희미하게나마 유지가 되고 이별에 대한 유예기간도 자잘하게 남아서 잔여 연애가 이어지고 있을 즈음에 있어서 전화라는 매개체는 아주 큰 역할을 한다. 아기의 애착 인형처럼 나를 떠나지 못하게 하고 밥을 먹다가도 잘 있는지 확인을 해야 하며 잠을 잘 땐 필수적으로 없어서는 안 될 애착 물건이다. 푸른 밤이 찾아오면 상대방은 나에게 전화를 걸어 낭떠러지에 간당간당 매달려 있는 우리의 관계를 다시 잡아끌어다 주어야 하고 그래서 안전지대에 제대로 발을 딛고 설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는 존재였다. 그 행동의 주체가 내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안 하면서.
시간은 정확히 새벽 두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나도 마침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며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이어폰 사이로 흘러나오던 ,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멋진 목소리가 사라지는가 싶더니 잠시 후 익숙한 멜로디의 벨소리가 노래를 대신해 귓가를 꽉 채웠다. 차라리 누구의 전화인지 정확히 알았더라면, 그 야심한 시간에 신원이 분명한 전화였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을 것이다. 상대는 스스로를 숨기고 싶었는지 "발신자 번호 표시제한"으로 정체를 감추고 있었다. 나는 받지 않으면 금방 사그라지고 말 벨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귓가에 꽉 채워진 벨소리는 몇 번을 반복하고 완전히 끝날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은 채 계속 울렸다. 도대체 왜, 이 시간에 굳이 이런 방법까지 동원해 나에게 전화를 걸 사람이 누굴까. 궁금했지만 알 방법은 없었다. 이런 식의 전화를 받고 나면 수많은 추측이 가능해진다는 게 단점이다. 혼자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받을 걸 그랬나 하며 괜한 후회도 한다.
수면 위로 떠오르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었다. 내가 생각한 사람이 맞는지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게 함정이지만. 내가 알고 내가 겪었던 그러면 이렇게 전화를 걸어서 물음표만 남겨놓고 사라지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을 했다. 내가 아는 그는 물음표보다는 느낌표가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또 누굴까. 생각을 해보면 또 어떤 이가 떠오르긴 했다. 연애를 잘하지도, 즐기지도 않았으면서 기가 막히게 그럴만한 사람들이 불쑥 떠오르긴 한다는 게 신기했다. 만난 지 한 달 만에 나에게 결혼 얘기를 꺼냈던, 그래서 사람 인연에 있어 타이밍이란 것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었던 그였을까. 무엇이 중요했을까 생각하면 그 시간 누군가 나를 일부러 찾았다는 그 자체, 그냥 그 자체만으로도 부재중 전화의 의미는 컸다. 그러며 묘한 희열감 같은 것도 생겼다. 내가 누군가의 그리움이 된 인물이었나 싶어서.
남녀관계에서 이뤄지는 사랑을 이야기로 한답시고 몇 천자, 몇 만 글자로 아무리 많이 쓴다고 한들 그건 그냥 요약이 될 뿐이고 압축이 될 뿐이다. 나 역시 너무나 간단하게 나의 연애를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이건 그냥 아주 일부일 뿐인 것이다. 하루 종일 이야기만 한다고 하더라도 나의 이야기는 끝도 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지기만 할 테니까. 감정이란 게 그렇다. 통제하지 않고 폭주하게 두면 나를 잡아먹고 고이 접어둔 추억까지 구질구질하게 만들어 버린다. 블랙홀 같은 거다. 나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몇 년이 지난 후 다시 하고 싶어진 사람일 수도 있고 어쩌면 서로의 빈자리를 확인해서 다시 서로가 채워주길 바란 사람일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다행인 건 누구도 나에게 모진 말로 쓴소리를 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는 안도감이 들더라는 사실.
누군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면 나는 또 생각이란 걸 하겠지. 전화기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이 시간에 광고는 아니겠지 하던가. 어떤 이의 노래를 듣고 상대는 나를 떠올린 건가 하면서 낭만에 젖던가. 내가 정말 통화버튼을 눌러 "여보세요?" 말하면 어쩌려고. 나는 내가 유리 한쪽으로 결론을 지을 거다. 추억이 그리웠다거나 미련이었다거나 하고 싶은 말을 다 못 해 전화를 걸었던 당신이었겠지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