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을 갓 시작했을 무렵, 처음이니 모르는 것 투성이었고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모든 공간들은 낯설고 무서운 것 투성이었다. 일은 배워야 하고 해야 할 것은 어렵기만 했다. 2인 1조로 하는 일이었고 모두 장소는 달랐지만 하는 일은 같았다. 병원의 차트를 찾아 정리하는 것이었는데 종합병원이다 보니 하루에 찾아야 하는 차트의 수가 몇 천 건이 되었다. 나로 인해 일에 능률이 오르는 것 같지 않고 나와 일하는 상대방도 자기의 일을 제대로 쳐내지 못하는 날들이 한 달여 쯤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일을 가르쳐 주면서도 잘한다거나 잘하고 있다거나 수고한다라는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앞세워 과시하려는 사람이었을 뿐, 오히려 나를 이해한 건 연륜이 있는 다른 팀의 선배였다. 그것이 섭섭하다기보다는 억울했고 화가 났다.
일은 점심을 먹고 난 뒤, 쉬는 시간에 터졌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2층 사무실에 와 있던 난 하필 그 자리에 없었고 비슷한 또래의 여자 선배와 나와 일을 하던 직속 선배 두 사람만 그 자리에 있었던 모양이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처럼 계단에서 내려오는 내 귀에 들리던 직속 선배의 목소리가 정확히 꽂혔다. "아니, 그게 그렇게 안되나? 맨날 내 일이 밀려서 미치겠다니까 벌써 한 달 되지 않았어? 진짜 답답하다니까" 그 말이 험담였기 때문일까, 나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든 그녀의 무례함과 이기심 때문이었을까. 커피가 차가워져 크림이 둥둥 떠오를 때까지도 눈물이 그치지를 않았다. 운 것을 티 내지 않으려 화장을 얼마나 고쳐댔는지...
그날 이후, 그녀를 바라보는 내 눈빛은 많이 변했고 대하는 마음까지도 완전히 바뀌었다. 대놓고 쌀쌀맞게 대하진 않았지만 거리를 두면서 사무적인 관계로만 지내왔고 모르는 일이 있으면 다른 선배에게 적극적인 태도로 물었다. 상처의 대가가 일의 능률을 올릴 수 있는데 한몫했다면 위로가 될지 몰라도 굳이 그런 일을 겪으면서까지 일궈내야 했을까 싶다. 어차피 모든 일은 시간이 걸리는 것인데...
주위에 험담을 즐기고 이게 안돼?라는 식의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은 되도록 거리를 두는 것이 상처를 줄이는 방법이다. 거리두기가 필요한 것이다. 나와 잘 통하는 사람,
생각이 비슷하고 나의 노력을 귀히 여기는 사람과 잘 지내면 되는 것이다. 여러 부류의 사람이 있지만 우리 역시 어느 부류에 속한 사람들이며 모두와 잘 지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은 해야겠다. 이게 잘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당연히 잘 안 되는 일이 세상엔 너무나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