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에서 만난 할머니

예상치 못한 만남

by 루담

지리산 둘레길에서 만난 할머니 이야기

예상치 못한 만남

지리산 둘레길 3코스, 인월에서 금계까지 이어지는 길을 걷고 있었다. 이른 아침 7시에 시작한 걸음이 어느새 오전 10시를 넘기고 있었고, 따가운 8월 햇살이 등짝을 달구기 시작했다.

"잠깐 쉬어가야겠다" 싶어 길가 정자에 들어서는데, 그곳에 한 할머니가 앉아 계셨다. 등에는 커다란 지게를 지고, 손에는 작은 부채를 들고 계신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첫 인사

"더우시죠? 여기 그늘에서 좀 쉬어가세요."

할머니가 먼저 말을 걸어주셨다. 7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의 목소리는 의외로 힘이 있었고, 주름 가득한 얼굴에는 따뜻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안녕하세요. 정말 더워서 잠깐 쉬어가려고요."

나는 할머니 옆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할머니의 지게에는 나물과 약초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할머니의 일상

"저는 매일 이 길을 다녀요. 벌써 20년째 되었지라."

할머니는 새벽 5시면 집을 나선다고 하셨다. 지리산 자락에서 자라는 각종 나물과 약초를 캐서 장에 내다 파는 것이 할머니의 일상이었다.

"도라지, 더덕, 취나물... 이 산에는 좋은 게 참 많아요. 도시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이런 게 진짜 보약이지라."

할머니의 손은 흙빛으로 거칠었지만, 나물 하나하나를 다루는 모습은 정성스러웠다.

변화하는 둘레길

"예전에는 이 길에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둘레길 생기고 나서는 참 많이 다녀요."

할머니는 둘레길이 생기기 전과 후의 변화를 이야기해주셨다. 예전에는 동네 사람들만 다니던 오솔길이었는데, 이제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그래도 좋아요. 사람들이 우리 산을 예뻐해주니까. 다만 쓰레기만 안 버리고 다녀주면 좋겠어요."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지리산에 대한 애정이 묻어났다.

인생의 지혜

물 한 모금을 마시며 할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할머니는 이 지역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오셨다고 했다.

"젊을 때는 도시로 나가고 싶었어요. 이런 깊은 산골이 답답하기도 하고... 그런데 나이 들고 보니 이만한 곳이 없더라고요."

할머니는 20대에 서울로 나가 공장에서 일했던 시절을 회상하셨다. 하지만 결혼과 함께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셨고, 그 이후로 쭉 이곳에서 살고 계신단다.

자연과 함께하는 삶

"이 나이까지 건강하게 사는 비결이 뭐예요?"

내가 물어보니 할머니는 웃으며 대답하셨다.

"매일 산을 다니고, 자연이 주는 걸 먹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별 거 없어요. 그리고 욕심 안 부리는 거지라."

할머니의 하루는 규칙적이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산에 올라 나물을 캐고, 오전에는 장에 내다 팔고, 오후에는 집에서 농사일을 하고, 저녁 9시면 잠자리에 든다.

자식 이야기

"자식들은 다 도시로 나갔어요. 서울, 부산... 명절에나 한 번씩 와요."

할머니에게는 삼남매가 있는데, 모두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셨다. 가끔 "시골로 내려와서 같이 살자"고 하지만, 할머니는 거절하신단다.

"나는 이 산이 좋아요. 도시 가면 뭐 하겠어요? 여기서 일하고 살다가 여기서 죽는 게 제일 좋지라."

계절의 변화

할머니는 지리산의 사계절을 모두 몸으로 체험하며 살아오셨다. 봄에는 나물, 여름에는 약초, 가을에는 버섯과 열매, 겨울에는 한해를 정리하며...

"요즘은 기후가 많이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8월에 이렇게 덥지 않았는데... 나물들도 때가 많이 바뀌었고요."

할머니는 기후변화를 몸으로 느끼고 계셨다. 수십 년간 같은 일을 해오신 분이기에 그 변화가 더욱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 추억

"우리 어릴 때는 이 둘레길로 학교를 다녔어요. 매일 2시간씩 걸어서..."

할머니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지금의 둘레길이 그때는 유일한 통학로였다고. 비가 와서 개울이 불어나면 학교를 못 가는 날도 있었고, 겨울에는 눈이 무릎까지 와서 길을 만들어가며 다녔다고.

"그래도 그때가 참 좋았어요. 친구들이랑 함께 걷고, 길에서 열매도 따먹고... 지금 아이들은 그런 재미를 모르지라."

현재의 행복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흘렀다. 할머니는 일어서며 지게를 다시 메셨다.

"아직 갈 길이 멀어요. 오늘은 인월 장에 가야 해서..."

할머니의 등은 구부정했지만, 걸음걸이는 여전히 힘이 있었다. 수십 년간 이 길을 걸어온 발걸음이었다.

"할머니, 건강하세요!"

"고마워요. 당신도 조심해서 잘 다녀가세요."

뒷모습

할머니가 둘레길을 따라 걸어가시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지게를 지고 굽은 등으로 걸어가시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숙연했다.

70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이 험한 산길을 다니시며 생계를 이어가는 할머니. 그 억척스러운 삶의 모습에서 진정한 강인함을 느꼈다.

내가 받은 선물

짧은 만남이었지만, 할머니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자연과 함께하는 삶의 소중함, 욕심 없이 사는 것의 가치, 그리고 현재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지혜.

도시에서 온 나는 둘레길을 '힐링 코스'로 생각했지만, 할머니에게는 삶의 터전이자 일터였다. 같은 길이지만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지리산이 주는 가르침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만난 할머니는 이 산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었다. 아름다운 풍경도 좋지만, 이곳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가 더욱 깊은 감동을 주었다.

할머니의 삶 속에는 지리산의 사계절이 모두 녹아있었고, 그 안에는 도시 생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진정한 여유와 평화가 있었다.

다시 걷는 길

할머니와 헤어진 후 다시 둘레길을 걸었다. 하지만 이제는 길이 다르게 보였다. 할머니의 이야기가 덧입혀진 이 길은 단순한 등산로가 아니라, 누군가의 인생길이자 삶의 터전이었다.

길가에 핀 들꽃 하나, 바위 위에 자라는 나무 한 그루도 모두 할머니와 함께 세월을 보낸 오랜 친구들 같았다.

마음에 남은 여운

지금도 그 할머니가 생각난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지리산을 오르고 있을 할머니의 모습이. 그리고 "욕심 안 부리는 게 비결"이라던 할머니의 말씀이.

바쁜 일상에 쫓겨 살다가 문득 마음이 복잡해질 때면, 지리산 둘레길에서 만난 할머니의 따뜻한 미소가 떠오른다.

지리산 둘레길에는 아름다운 풍경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는 수십 년을 그 땅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고, 그들의 삶 속에 녹아있는 진정한 지혜가 있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만남이 여행의 가장 소중한 선물이 되기도 한다. 지리산에서 만난 할머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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