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걷는 사람들이 남긴 말들
비 오는 날엔
세상이 잠깐,
천천히 걸어가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도로 위 자동차도,
가게 앞 노부부도,
시장 가던 아주머니도
모두 발걸음을 늦춘다.
빗소리 속에서
평소엔 들리지 않던
말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어매, 저 사람 아직도 저길 걸어가네.”
식당 창가에 앉아 계신 할아버지가 중얼거리신다.
창밖엔 우산도 없이,
천천히 걷는 노인이 있었다.
“저 사람…
옛날엔 저기서부터 저기까지
한 번도 안 쉬고 뛰어다니던 양반이라.”
누군가가 기억을 꺼낸다.
나는 문득 생각한다.
빗속을 걷는 건,
지금을 견디는 일인 동시에
예전의 자신을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구나.
천천히 걷는 건
그저 느려서가 아니라
내가 지나온 시간을
잠깐 되짚어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비 오는 날엔
조금 늦어도 괜찮다.
기억 속 사람들도
오늘을 걷는 사람들도
어딘가 어깨를 적시며
똑같이 내리는 빗속을 지나간다.
그래서 오늘 같은 날엔
천천히 걷는 사람들을
그냥 바라보는 것도 괜찮다고,
나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