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국물 속의 기억
2화: 국물 속의 기억
사흘이 지났지만 돌조각의 일은 꿈만 같았다. 루담은 그 돌을 식당 서랍 깊숙이 숨겨두었다. 만질 때마다 이상한 목소리가 들리는 게 무서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꿈은 여전했다. 매일 밤 하얀 한복의 여인이 나타나 돌을 쌓고, 무너뜨리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멍멍! 멍멍!"백구가 또 짖고 있었다. 루담이 키우는 흰 털의 중형견 백구는 며칠 전부터 이상한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하루 종일 뒷산 쪽을 바라보며 짖거나, 가끔은 슬픈 듯한 울음소리를 내기도 했다."백구야, 왜 그래? 뭐가 보여?"루담이 다가가자 백구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반겼지만, 여전히 산 쪽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어서 오세요."정오가 되자 손님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평일 점심시간의 단골들이었다. 농협에서 일하는 김 과장, 마을 이장인 박 씨, 그리고 우체국 직원 이 선생까지."루담아, 메밀국수 하나!""저도 같은 걸로요.""여기 국수 세 그릇!"익숙한 주문들이 이어졌다. 루담은 능숙하게 면을 뽑고 육수를 끓였다. 5년간 갈고닦은 실력이었다. 메밀가루를 반죽하고, 얇게 밀어서 가늘게 써는 과정이 거의 예술에 가까웠다. 특히 육수는 루담만의 비법이 있었다. 멸치와 다시마, 그리고 뒷산에서 직접 따온 약초들을 우려낸 맑은 국물. 거기에 들어가는 건 단순한 재료들뿐이었지만, 맛을 본 사람들은 모두 감탄했다."후후, 역시 이 맛이야."김 과장이 국수를 한 젓가락 호로록 넘기더니 갑자기 멈췄다. 그의 얼굴에 이상한 표정이 스쳤다."어? 이게…""김 과장님, 무슨 일이세요?""아니야, 그냥… 갑자기 어릴 때 생각이 나더라고. 우리 할머니가 해주던 국수 맛이랑 똑같은 것 같아서."루담은 고개를 갸웃했다. 김 과장은 이 국수를 수백 번도 더 먹었는데,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걸까?"저도 그래요." 이 선생이 끼어들었다. "왜 이렇게 옛날 생각이 나죠? 분명히 잊어버렸던 일인데…"그때 박 이장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이상하네. 나도 갑자기 40년 전 일이 떠오르네. 그때 이 마을에 큰 산불이 났었는데, 그 다음날 산에서 이상한 울음소리가 들렸던 게 생각나네.""산불이요?""응, 그때 나는 스무 살이었는데… 분명히 기억에서 사라진 일인데 왜 갑자기 선명하게 떠오르지?"루담은 점점 불안해졌다. 손님들이 국수를 먹고 나서 모두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잊혔던 옛 기억들을 갑자기 떠올리는 것이었다."멍멍! 멍멍!"밖에서 백구가 더욱 크게 짖었다. 루담이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니, 백구가 뒷산을 향해 꼬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저 개, 며칠째 저러네.""백구 원래 안 그랬는데…"손님들도 하나둘 백구를 바라봤다. 그런데 이상했다. 백구의 눈에서 눈물 같은 것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저기, 손님들…"루담이 말을 꺼내려던 순간, 식당 문이 열리며 심애 할매가 들어왔다. 할매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욱 심각해 보였다."루담아, 잠깐 나와봐.""할매, 무슨 일이세요?""밖에서 이야기하자."심애 할매는 루담을 식당 뒤편으로 데려갔다. 백구가 있는 곳이었다. 개는 여전히 산을 바라보며 작게 울고 있었다."루담아, 네가 만드는 국물 말이야.""네?""그 안에 뭘 넣니?""그냥 평범한 재료들뿐이에요. 멸치, 다시마, 그리고 뒷산 약초 조금…""약초를 어디서 따오니?""뒷산 중턱쯤에 있는 샘 근처에서요. 거기가 제일 좋더라고요."심애 할매의 얼굴이 굳어졌다."그곳은… 마고의 우물이야.""마고의 우물이요?""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어. 그 우물가에서 자라는 풀들은 사람의 혼을 맑게 해 준다고. 잊힌 기억도 되살려주고, 막힌 것들도 뚫어준다고 했지."루담은 소름이 돋았다. 손님들이 국수를 먹고 나서 옛 기억을 떠올린 것도 그 때문이었던 걸까?"할매, 혹시…""그래, 네 국물에 깃든 건 단순한 육수가 아니야." 심애 할매가 루담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건 기(氣)다. 산의 기운이야."그때였다. 루담의 주머니에서 뭔가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돌조각이었다. 서랍에 넣어두었는데 언제 주머니에 들어간 걸까? 돌을 꺼내자마자 목소리가 들렸다.*"네가 만드는 음식에는 특별한 힘이 깃들어 있다."*루담은 깜짝 놀라 돌을 떨어뜨릴 뻔했다.*"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잃어버린 것들을 찾게 해주는 힘이다. 너는 이미 나의 후계자로서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루담아, 괜찮니? 얼굴이 하얗네."심애 할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루담은 돌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만 집중했다.*"하지만 조심해라. 네 능력을 눈치챈 자들이 있다. 그들이 오기 전에 준비해야 한다."*백구가 갑자기 크게 짖었다. 그리고는 루담에게 달려와 바지를 물고 뒷산 쪽으로 끌어당겼다."백구가 뭔가 알고 있는 것 같네." 심애 할매가 중얼거렸다. "동물들은 사람보다 예민하거든."루담은 돌조각을 꽉 쥐었다. 따뜻한 기운이 손끝에서 팔로, 팔에서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뭔가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식당 안에서는 여전히 손님들이 저마다의 옛 기억을 떠올리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몰랐다. 자신들이 먹은 국수 한 그릇이, 잊힌 진실을 깨우는 열쇠였다는 것을. 그리고 그 진실들이 모이면, 이 마을에 감춰진 거대한 비밀이 드러날 것이라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