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양칠성
인생의 정오를 지나 ‘쉰’이라는 고개에 이르면 누구나 등 뒤의 발자국을 돌아보게 된다. 그 자취가 늘 곧기만 했다면 좋으련만, 때로는 구부러졌고 때로는 오물에 젖어 있다.
그런데 여기, 그 발자국을 바로잡을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스물아홉의 나이로 형장의 이슬이 된 사내가 있다. 인도네시아의 독립 영웅 코마루딘, 일본군 군속 야나가와, 그리고 전북 완주 출신 조선인 양칠성.
이 세 개의 이름은 한 사람의 생을 가리키며, 식민의 시대가 남긴 가장 난해한 모순을 품고 있다.
세 개의 이름을 가진 한 청년
1942년, 완주의 청년 양칠성은 일본군 군속으로 자바섬에 배치되었다. 지원이었는지 강제 동원이었는지는 증언이 엇갈리지만, 이후의 행적을 보면 지원 쪽에 무게가 실린다. 그는 그곳에서 ‘야나가와’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연합군 포로를 감시했고, 현지인과 가정을 이루며 전쟁 한복판의 일상을 살아냈다.
1945년 종전 후에도 그는 귀국 대신 인도네시아에 남는 길을 택했다. 네덜란드가 식민 지배를 복원하려 하자 동료들과 함께 ‘판란(Pangeran, 왕자) 부대’를 조직했고, 지형에 밝았던 그는 치밀한 게릴라전으로 적을 괴롭혔다.
치마눅 강 철교를 폭파해 네덜란드군의 진격을 늦춘 전공은 지금도 현지에서 전설처럼 회자된다. 민중은 그를 ‘달빛처럼 빛나는 신앙심’이라는 뜻의 이름, 코마루딘으로 불렀다. 식민지 조선인이 피식민지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도운, 보기 드문 선택이었다.
처형 직전의 외침, 지울 수 없는 물음
그러나 1949년 체포와 처형의 순간, 그는 뜻밖의 말을 남겼다.
“덴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 인도네시아를 위해 피 흘린 영웅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 외침은, 그의 삶 전체를 뒤흔드는 질문이 되었다.
황민화 교육이 새겨 넣은 언어는 내면의 정체성까지 잠식하고 있었다. 자신을 억압한 제국의 구호를 마지막까지 끌어안았다는 모순, 그 한마디 때문에 그는 한국 역사에서 오랫동안 외면받았다. 조선인으로서 인도네시아를 도우면서도, 정신의 가장 깊숙한 자리에서는 일제의 신민으로 남아 있었던 셈이다.
인도네시아가 기억하는 방식
아이러니하게도 한국과 일본이 그를 난처해할 때, 인도네시아는 그를 품었다. 1975년 정부는 그의 유해를 가루트 영웅 묘지로 이장했고, 오늘날 그는 ‘외국인 출신 독립 영웅’으로 확고히 자리한다. 일본군이라는 배경보다, 가장 어두운 시절 곁에서 싸운 그의 진심을 국가 차원에서 인정한 것이다. 역사는 때로 태어난 모국보다, 자신이 도움을 준 땅에서 더 너그러워진다.
만약 그에게 쉰 살의 시간이 주어졌다면...
양칠성은 1919년생이다. 그가 살아남아 1969년, 지천명의 나이 50세를 맞았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서애 유성룡이 환란의 성찰을 담아 『징비록』을 써 내려갔듯, 그는 자신의 생을 기록했을지도 모른다.
젊은 날 제국의 하수인으로 살았던 과오를 참회하고, ‘반자이’를 외쳤던 모순된 순간을 붓끝으로 해부하며 독립의 의미를 다시 물었을 것이다.
혹은 전쟁의 참패를 딛고 노련한 지도자로 거듭난 처칠처럼, 인도네시아와 한국을 잇는 가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쉰 살의 양칠성이라면 ‘코마루딘’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조선인의 아픔을 더 당당히 드러내며, 부끄러운 과거를 성숙한 공헌으로 씻어내고자 했을 것이다.
반성하고 사죄할 수 있다는 축복
우리는 쉽게 “이미 늦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스물아홉의 생만 허락받았던 양칠성을 떠올리면 그 말이 사치처럼 느껴진다. 그는 오류를 교정할 물리적 시간조차 얻지 못했다.
50을 넘어 과거를 돌아보고, 잘못을 인정하며, 남은 생으로 참회하고 사죄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특권이다. 유성룡의 붓끝에서, 처칠의 결단에서, 그리고 오늘 우리가 품는 ‘어제의 나를 바로잡는 용기’에서 인생의 완성은 시작된다.
쉰 살을 넘겼는가. 그래도 축하할 일이다.
우리에겐 아직 자신만의 『징비록』을
써 내려갈 시간이 충분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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