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무대 위의 무희' by Edgar Degas
발레만큼 우아한 것이 또 있을까? 눈부시게 하얀 치마와 토슈즈를 신은 발레리나들의 군무에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발레리나'를 주제로 해서 그 누구보다도 많은 작품을 남긴 한 화가가 있는데, 바로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인 '에드가 드가'이다.
구글에서 'dancer'라는 작품명으로 검색을 하면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이 바로 에드가 드가의 발레리나 작품들이다. 그런데 작품을 보면 우리가 '발레리나'를 생각할 때 가장 많이 떠올리는, 우아한 동작을 하고 있는 무대 위의 발레리나의 모습을 화폭에 담은 것이 아니다.
드가는 무대 뒤편에서 다리를 한껏 피고 포즈를 연습하거나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발레리나의 모습들을, 마치 몰래 무대 뒤로 숨어들어 찍은 파파라치샷처럼 그려냈다.(실제로 드가가 살아생전에 받은 가장 많은 의심 중의 하나도 '관음증 환자'였으니, 알 만하다)
사실 드가는 상당히 잘 살았던 부르주아 출신 집안 출신으로 40살이 되기 전까지는 작품을 판매해서 삶을 꾸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 있어야 예술을 하는 현실!) 그러다가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면서 생각보다 많은 빚을 가지고 있는 걸 알게 되었고, 이때부터 생계유지가 아주 중요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 즈음부터 소위 '잘 팔리는'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그렸던 시리즈가 바로 이 발레리나 시리즈이다.
실제로 발레리나 작품들은 당시 사람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돈 걱정할 일도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드가의 인생에서 이 발레리나 작품들은 전체 작품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는 주요 주제가 되게 되면서 드가는 흔희 '무희의 화가'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앞에서 본 것처럼 드가의 작품 속 발레리나들은 ‘아름다움’을 뽐내는 대상으로만 그려지지 않았다. 드가는 실제로도 당대인들의 삶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아주 날카로운 관찰력을 뽐냈는데, 요즘으로 따지자면 마치 르포 기사처럼 사건 현장을 담듯이 적나라한 현실의 순간들을 화폭에 담아냈다.
특히 아름다운 발레리나를 그리면서도 예리한 눈으로 발레 뒤에 숨은 어두운 이면을 담아낸 작품이 있다. 바로 그의 발레리나 작품들 중 가장 대표 격이라고도 할 수 있는 '별, 무대 위의 무희'라는 그림이다.
제목 그대로 화면에 보이는 것은 화려한 발레 공연이 한참 진행 중인 무대에서 한 발레리나가 공연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발레리나는 눈이 부시도록 화사한 흰 발레복을 입고 우아한 동작을 보여주고 있어서, 그림을 그냥 쓱 보고 지나친다면 아름다운 발레의 한 장면을 그렸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 이 그림에서 드가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아름다운 발레리나뿐만이 아니다.
시선을 조금 돌려서 발레리나의 뒤편, 즉 무대 안 쪽으로 옮겨보면 조금 뜬금없어 보이는 장면이 있다. 다음 순서를 대기하는 발레리나들이 있어야 할 장소에 검은 정장을 입고 서 있는 남자 한 명.
얼굴은 가려져 있지만 그의 몸이 향하고 있는 방향을 보면, 분명히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무대 위에 있는 발레리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드가는 왜 굳이 이 남자를 무대 뒤편에 그려 넣었던 걸까. 드가는 사실 이 검은 정장의 남성을 통해서 발레에 숨은 어두운 이면까지도 함께 화폭에 담았던 것이다.
드가가 살았던 당시의 발레는 폭발적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게 되면서, 요즘 유행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나 아이돌 산업처럼 엄청난 호황을 누렸던 큰 산업이었다고 한다.
특히 가난한 10대 여자아이들이 발레리나에 많이 지원을 하게 되는데, 산업화 사회에서 가난한 노동자 출신의 어린 여성에게는 발레리나가 되는 것이 부와 명성을 보장해 주는 유일한 길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여자 아이들이 발레리나에 지원을 했고, 이에 맞추어 이들의 수업료를 1대 1로 후원하는 부르주아 계층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어두운,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이면의 세계가 있는데, 바로 후원자와 후원을 받는 발레리나가 지속적인 성상납 관계로 이어지는 경우가 꽤나 많았던 것이다.
많은 후원금을 받는 어린 10대 아이들에게는 후원자들의 존재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후원자들에게는 자신이 후원하는 아이의 공연 모습을 무대 바로 안쪽에서 참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한다.
즉, 작품에서 무대 뒤편에 서서 발레리나를 응시하는 남성은 바로 그녀의 후원자. 그는 과연 어떤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드가는 무대 뒤편의 이 후원자의 얼굴을 적나라하게 그리는 대신에 무대 장치로 교묘히 가렸다. 아마도 특정한 사람을 그려내기보다는 이러한 이면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었던 듯하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또 모두가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아하는 터부는 어느 사회에나 있다. 이런 이야기들을 주목하고 그림을 통해 표현했던 드가는 누구보다 '날카로운 눈'을 가졌던 화가가 아닐까.
예술은 당신이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을 보게 만드느냐의 문제이다.
- 에드가 드가
Art is not what you see, but what you make others see.
- Edgar Deg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