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직장인의 가벼운 미술 작품 이야기
아주 어릴 때부터 손으로 만들고 그리는 것을 곧잘 했다. 나는 7살이 되자 미술학원을 보내달라고 엄마를 조르기 시작했는데 그런 나를 엄마는 당시 유행하던 어린이를 위한 '미술 학원'이 아니라 '화방'에 등록시켰다. 화방을 오는 사람들은 주로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중고등학생 혹은 미대생 언니 오빠들이었기 때문에, 어린 나는 언니오빠들의 상당히 멋져 보이는 그림들을 보며 화방을 다녔다.
화방에서 제대로 배우는 미술은 초딩에게는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화방 선생님은 좋은 의미에서 깐깐하셨던 분으로, 데생의 비율이 제대로 맞지 않을 때는 자로 손등을 때리면서 엄하게 혼내셨고 수채화에 색을 덕지덕지 덧칠하고 있으면 '수채화는 물로 표현하는 맑은 세계야. 이렇게 혼탁한 수채화가 어딨니!'라며 진심으로 화를 내셨다. 어떠한 세계를 표현하기에 나는 너무 9살 초딩이었는데...... 하지만 멋진 그림을 그려 낸다는 건 어린 마음에도 스스로가 멋있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선생님께 '손이 야무지다'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름 아주 즐겁게 화방을 다녔다.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나 맬 법한 화통을 등에 메고 화방을 다니는 것은 어쩐지 늘 어깨가 으쓱한 일이었다. 중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다녔으니 총 8년 정도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곧 사춘기가 오면서 나는 부모님의 눈밖에 나기 시작했다. 학교에는 맨날 지각하고 친구들하고 뻔질나게 돌아다니기 시작하며 성적은 죽죽 떨어지기 시작했고, 부모님은 벌로 화방을 끊어버리셨다. 하지만 '미술'이라는 것은 두고두고 나에게 미련을 남겼다.
대학에 가게 될 때 다시 한번 미술을 전공으로 삼아보려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미술을 대학 전공으로 삼는다는 것은 상당한 돈이 필요한 일이었다. 나는 아주 쉽게 포기할 수 있었다. 미술 비스므리한 일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야심 차게 생활과학대를 지원했지만 이것 또한 야무지게 떨어지고 말았다. 결국은 취업이 가장 쉽게 된다는 경영학과를 가게 되었고 그렇게 좋아했던 '미술'과는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누가 취미생활을 물을 때면 나는 곧잘 '미술/그림 그리기'라고 적어 내길 좋아했다. 실제로 좋아하기도 하고, 왠지 있어 보였으니까.
그렇게 학교를 졸업하고 평범하게 회사원이 되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이 남의 돈 받아먹기는 참 어렵고 회사는 지루했다. '와 오늘 이 정도면 정말 집중해서 일을 많이 했는데?' 싶어서 시계를 쳐다보면 정확히 5분이 지나있었다. 앞으로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아니면 새로운 꿈을 찾아야 하나? 아니, 대학 공부까지 하면서도 못 찾은 꿈을 이제 와서 어디 가서 찾는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이렇게 재미도 없이 돈 벌어서 쓰다 그냥 죽는 건가? 아 이런 날파리만도 못한 내 인생...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미술'을 어떻게 다시 해볼 수는 없을까. 아니, 그런 전문분야를 이제 와서 다시 시작하다니 말도 안 되지.
그렇게 지지부진 연차만 쌓여가던 차에 우연히 미술 작품 해설가 분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미술 전공자가 아니셨지만 우연한 기회로 미술관 가이드를 시작하신 그분의 미술 해설은 아주 친근하고 쉽게 느껴졌다. 어디서 많이 보긴 했지만 도대체 뭐가 그렇게 멋진 건지 잘 모르겠던 르네상스 시대 미술작품들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미술이란 건 직접 그리는 일도 참 즐거웠었지만 멋진 작품들에 대해 알아보는 일도 아주 즐거운 일이었다. 그리고 미술사 공부라니, 뭔가 쫌 우아해 보이지 않는가! 그때부터 조금씩 미술사와 관련된 책들을 뒤적여 보기 시작했다.
미술사 전공자가 아닌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제일 쥐약 같은 미술사 공부 방법은 일단 고대부터 시작하는 미술사 책을 보는 것이다. 동굴 벽화부터 시작해서 이집트 미술까지 시대 순서대로 보다 보면 로제타석이 나올 때쯤에 딱 잠들게 되어있다. 그러면 수학의 정석을 공부할 때처럼 앞 몇 페이지만 새까맣게 된 채로 책은 책장에서 푹푹 썩게 된다. 평생을 시도해 봐야 르네상스 시대 작품까지 도저히 가볼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했던 방법은 흥미가 가는 몇 가지 작품만 아주 자세히 공부해 보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시대사 순서 랑은 상관없이, 그저 내가 꽂히는 작품들을 하나씩 자세히 찾아보기 시작했다. 세상이 워낙 좋아져서(세상 다 산 사람 같은 말투!) 미술 작품에 대한 정보는 정말 차고 넘친다. 하나씩 찾아보다 보니 의외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사실은 작품 자체보다 숨겨진 뒷 이야기가 재미있을 때가 많았다. 화가가 연인을 8번을 갈아치우고 그때마다 작품이 드라마틱하게 변했다든가 비극적으로 자살을 했다든가 하는 이야기에 마음이 쏠렸다.
때로는 그림을 사고팔다가 생긴 막장 이야기가 더 재미있을 때도 있었고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현대 미술 작품의 배경을 알고 코끝이 찡할 때도 있었다. 작품을 통해서 몰랐던 역사적 사건을 새로 알게 될 때도, 그런 이야기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드인 '왕좌의 게임'의 배경이 되었다는 사실들을 알게 될 때도 즐거웠다. 그때까지 늘 '미술'이란 것은 피나는 공부 끝에 전문가 수준이 되어야만 향유하는 그런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 같은 평범한 직장인도 나름의 방식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작품과 작가를 하나씩 늘려갔다.
사실은 지금도 미술 시대별로 작가를 완벽히 구분하거나 작품을 보자마자 화가를 알 정도의 수준은 전혀 되지 못한다. 종종 미술사 시대도 헷갈리고, 비슷한 풍의 작가 이름이 오락가락하기도 한다. 그래도 충분히 즐겁다. 현대 미술 작품의 의미를 혼자서 분석하고 유추해 보기도 한다. 내 맘대로 생각한다고 해도 누가 뭐라 할 테냐! 어차피 이건 내 취미생활일 뿐이라고. 프랑스 자수를 취미로 가진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1주일에 작품 5개를 만들어내야 한다거나, 자전거를 취미로 하는 사람이 하루에 최소 30km는 달려야 한다는 하는 법적 기준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냥 나 혼자만의 즐거운 취미생활인 거다.
그래도 이런 취미를 가지게 된 이후로 삶이 전보다 쪼끔 즐겁다. 미리 공부해 두었던 작품을 보러 멀리 여행을 떠나고, 그렇게 찾아간 미술관에서 작품을 실제로 볼 때의 기쁨이 있다. 우연히 찾아간 미술관에서 아는 작가의 작품을 발견하면 어쩐지 중학교 동창이라도 만난 듯 반갑다. 미켈란 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을 구분하는 내가 좀 자랑스럽기도 하다. 미술사 책을 읽어도 아주 모르겠는 느낌이 아닌 것도 좋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내가 하고픈 이야기는 미술사라고 이름 붙이기도 어려운 그냥 개인적인, 아주아주 가벼운 미술 작품에 대한 이야기다. 몰라도 상관없고 알아도 사는데 큰 도움은 안되지만 그래도 알면 쫌 재미있는 미술 이야기. 알고 나면 그래도 뭔가 쪼끔 우아해지는 느낌이 드는, 미술과 미술관 그리고 미술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되겠다.
여전히 나에게 '미술'은 뭔가 있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누군가 나에게 취미가 뭔지 물으면 눈을 살짝 내리깔고 고상한 척 이야기한다. '미술 작품 감상'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