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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유 Sep 14. 2023

무릉도원보다 지금 삶이 더 다정하도다

<월하전진도> 청강 김영기

수묵화는 어렵다. 미술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수묵화를 포함한 우리나라 작품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아니, 잘 모른다는 것보다는 잘 보지 않는다는 말이 더 맞겠다. 어차피 전문가도 아닌 다음에야 결국 좋아하는 작품과 예술가를 파게 되기 마련이므로.


그래서 수묵화 까막눈(?)인 내 눈에는 모든 수묵화가 다 비슷비슷해 보인다. 일단 먹으로 그렸으니 색깔이 모두 비슷하고, 자연을 묘사한 주제도 대부분 유사하다. 이런 상황이니 작가의 화풍 또한 구분해 낼 재간이 없다.


그래서 오랜만에 방문하게 된 전시회가 한국화 전시회여서 살짝 난감했다. 그날 만약 아주 조금이라도 시간의 여유가 더 있었다면 분명히 다른 미술관을 방문했을 것이다. 그래도 간만의 미술관 나들이니까, 뭐라도 좋겠지 뭐! 하면서 가게 된 전시가 바로 <무릉도원보다 지금 삶이 더 다정하도다> 였다.


한국화(韓國畵)는 근대 이후에 한국의 전통적인 기법과 양식으로 그려진 그림을 서양화와 구분하면서, 동시에 일본과 중국의 그림과도 구분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다. 제주도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 전시회에서는 19세기 중반부터 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한국화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었다.


사실 첫 전시장부터 좀 난항이었다. 역시, 내가 우려하던대로 바로 그 '아무리 봐도 뭘 느껴할지 잘 모르겠는'작품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뭘 그렸는지는 알아보겠다는 점에서 현대미술 작품보다는 쪼끔 나은가...싶었다가도 어두운 전시장에서 비슷비슷한 작품들을 계속 보고 있자니 정신이 살짝 몽롱해지면서 잠이 올 것만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시선을 확 잡아챈 작품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청강 김영기 선생님의 <월하전진도>였다.


<월하전진도>, 청강 김영기


무채색의 작품들 사이에서 청량한 푸른빛이 화면을 시원하게 휘감고 있었다. 가운데 저 둥그런 건 달인가? 하는 순간에 그 주변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무리가 보인다. 뭐지, 새들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찰나에 다시 보니 어머나, 그것들은 너무 귀여운 새우들이었다!


수묵화에 웬 새우지? 아니 그보다 내가 봤던 작품들 중에 새우가 주제가 된 적이 있었나? 순간 여러 궁금증이 몰려들어 전시도록을 펼쳤다. 작품 제목은 <월하전진도> '달 아래에서 앞으로 전진하는 그림' 이라는 뜻이었다. 달빛 아래 전진을 한다는 제목만 들으면 얼마나 기개가 넘치는가! 아마 작품을 보지 않고 제목만 보았다면 한밤중에 적진을 치는 용병 무리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진지한 전진을 하고 있는 무리가 다름 아닌 새우와 물고기들이라니, 이렇게 귀엽고 용맹할데가 다 있나.


간략한 작품 설명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달을 중심으로 새우와 물고기가 무리를 지어 한 방향으로 도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 무르익은 신록을 관광하고 여관 한구석에서 40년전 북경 유학시절 모습을 떠올린다'


청강 김영기 선생은 한국화가이자 동시에 미술사가였다. 서화가아버지 밑에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자연스레 배웠고 스물이 갓 넘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공부했다. 해방이후에는 동양화와 미술을 소개하는 글을 열정적으로 발표했으며, 1950년대부터 '동양화'대신 '한국화'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며 우리나라 예술의 고유성을 지키려 노력했다.


20대 시절의 그는 젊고 꿈이 있고 야망이 넘쳤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곁에 그런 자신과 꼭 닮은, 발을 맞춰 함께 길을 걷는 많은 친구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대한 나라 중국에서 이제 갓 성인이 된 자신의 모습은 마치 작디 작은 새우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렇게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동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전진 또 전진!을 외치며 최선을 다해 고군분투 했을 것이다.


어두운 달밤, 누구도 신경쓰지 않지만 열심히 물살을 헤치며 나아가고 있는 새우와 물고기들 무리에서 자신과 동료들의 젊은 시절을 떠올렸던 것일까. 어쨌든 덕분에 나 또한 오랜만에 나와 동료들의 대학시절 모습을 떠올렸다. 그 어두운 물살 속에서 무언가를 쫓기 위해 무릉도원보다 더 다정한 한때를 함께 보냈던 그들이 모두 안녕하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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