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렌 시오자와 개인전 <Secret Place-Finally met>
어제 한 갤러리에서 나의 첫 소장 작품을 구매했다. 예정에 없었던 일이기에 조금 충동적이었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한 편으로는 오래 전부터 기다려 온 작품을 운명적으로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작년부터 24년에는 결혼 10주년을 기념해 꼭 의미있는 첫 작품을 소장하겠다 마음 먹었었다. 그래서 틈틈이 아트페어에 갔었지만 작품을 들인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첫 작품' 이라는 의미를 크게 부여해서 더 어려웠던 것일 수 도 있다.
사실 마음에 드는 작품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정말로 마음에 쏙 드는, 당장 그 자리에서 집으로 데려가고 싶은 작품들은 천만원대였다...하하하... 의미를 찾자고 파산을 할 순 없었다.
어쨌든 어제는 간만의 미술관 나들이였고, 들뜬 마음으로 여러 전시회의 정보를 뒤졌고, 그러다가 우연히 전시회 포스터에 찍힌 한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밝고 화려하기도, 동시에 아련하기도 한 색채였다. 화사한 빛깔과 작은 유럽풍 건물이 로코코 양식의 분위기를 띄는 것도 같았고, 형체와 붓질이 흩어지는 것이 추상화 같기도 했다.
작가는 '시오자와 카렌'이라는 일본 작가였고 용산의 한 갤러리에서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그 작품 하나에 꽂혀서 아침 오픈 시간에 맞춰 갤러리를 찾아갔다.
미술품은 확실히 실제로 봤을 때의 아우라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사진은 작품의 크기, 물감의 질감, 색채가 실제로 지닌 빛깔, 작품이 놓여짐으로써 달라지는 공간의 감각을 온전히 담기 어렵다. 실물로 마주한 카렌 작가의 작품들도 그랬다.
색채의 빛깔은 훨씬 더 눈부시게 찬란했고, 아련하다 못해 더 처연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빛깔들이 출렁이는 작품들 속에 사진으로는 미처 볼 수 없었던 아주 아주 작은 여자 아이가 한 명씩 그려져 있었다.
작품 속의 아이는 귀여운 밀짚모자를 쓴 채 혼자 나룻배를 타고 있거나, 파라솔 밑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때로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서 있기도 했다. 추상적인 색깔과 붓터치로 일렁이는 공간은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아름다운 유럽의 성이기도 하고, 거대한 꽃이나 풀잎이 흐드러진 요정의 숲 같기도 했다. 동화 속 한 장면 같기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 속 환상적인 공간 같기도 했다.
작은 소녀의 마음 속을 꽉 채운 아름다운 공간. 순진했고, 꿈과 기대가 가득했고, 지켜지지 않을 약속들과 이루어지지 못할 소망들을 아직 눈치채지 못했던, 작은 아이의 아름다운 상상만이 가득했던.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유년 시절.
그 작은 소녀를 작품 속에서 발견했을 때 조금 울컥했다. 그건 바로 나였다.
나는 상담을 시작하며 내가 허구의 독립을 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부모의 부모 역할을 하며 일찍부터 지나치게 어른스럽게 굴었다. 항상 이성으로 감정을 억눌렀고, 모든 것이 이해되는 체 했다. 그 작은 소녀는 자신이 상상속에 만들었던 예쁜 공간들을 뭉게버리고 사춘기도 없이 바로 어른이 되었다.
상담을 통해 나는 많은 것이 좌절된 나의 어린 시절을 계속 복기했다. 원망과 분노와 서글픔에 벅차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엉엉 울고 있는 내 안의 소녀를 만나는 건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한 번 울기 시작하니 끝을 모르고 우는 이 아이를 진정시킬 방법을 도저히 찾을 수 가 없었다. 그러다 이 작품을 만난 것이다.
시오자와 카렌은 유년 시절을 네덜란드에서 보냈다고 한다. 그녀는 작품을 통해 각자의 어린시절에 경험한 풍경, 감각, 소리를 상기시킴으로써 과거의 기억과 현재, 꿈과 현실을 연결하는 작업을 한다. 네덜란드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니, 엄청 잘 살았구만, 하고 문득 생각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 어떤 사정이 있고 어떤 일이 겪었을지 내가 함부로 짐작할 수 없다.
분명한 건 그녀가 그려낸 아름다운 빛깔에는 행복과 슬픔의 빛이 동시에 어려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우리는 각자의 행운과 불행을 겪으며 삶을 이어간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지금보다 더 순수했던 유년 시절이 있다. 그녀의 작품은 그 시절에 대한 향수의 감각을 일깨운다.
어쩌면 전시장 말미에서 만난 이 문구가 아니었다면 작품을 구매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만났네요."
나의 어린 소녀가 건네는 반가운 인사. 나는 지금 눌러왔던 고통의 기억만 계속 끄집어내고 있지만, 어쩌면 이 어둠을 모두 걷어내면 그 안에는 소소한 행복을 누렸던 밝은 어린 소녀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소녀가 해사한 얼굴로 웃어주며 내 양 손을 잡고 나에게 이렇게 인사해주지 않을까.
왜 이제 왔냐고, 날 찾아주길 기다리고 있었다고. 우리가, 드디어 드디어 만났다고.
이 작품과 함께하며 가까운 미래에 내 유년시절의 슬픔과 행복을 모두 받아들이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때는 나도 웃는 얼굴로 소녀에게 인사해주고 싶다.
안녕, 찬란하고도 애처로운 나의 소녀야. 안녕. 드디어 만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