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성공은 보장 못합니다.
아이의 하교길에 강아지를 데리고 갔다. 아이는 친구들과 하교하다가 나와 강아지를 보면 눈이 동그래져서 친구들에게 '앗, 우리집 강아지다! 우리집 강아지야!' 하고 방방 뛴다. 그렇게 만나서는 공원에서 한 차례 산책을 마치고나서야 집에 들어온다. 이 날도 그랬다.
집에 들어와서 손을 씻고 강아지에게 간식을 주고 몇 가지 루틴을 착실하게 이행한 뒤에, 씻어준 과일 몇 알을 집어먹더니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간다. 숙제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선 모양이다. 코로나 때문에 급식 후 하교를 하게 되면서 5교시는 집에서 해야 한다. 보통 A4용지 한 장 짜리 학습지를 가져온다. 색칠을 하거나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야 하는 것들이 그 내용이다. 팔랑팔랑 A4용지를 뒤적이는 소리가 나고 이어서 이것저것 책장 넘기는 소리가 얼마간 들리더니 조금 있으니까 풀죽은 표정을 하고 문 밖에 선 아이가 보인다.
그 표정이 낯설지 않다. 아니 아주 낯익다. 구몬수학, 구몬한자, 아빠가 내준 성문영문법 공부에 EBS까지. 책상에 앉았다가는 애꿎은 서랍 정리만 왕창하고 천근같이 무거운 연필을 들었다 놨다 할 때 탁상 거울에 비췄던 어렸을 때 내 얼굴과 아주 닮은 ‘숙제싫어언제다해진짜하기싫다’의 표정.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세상 근심 다 떠안은 표정으로 말한다.
- 엄마 오늘은 왜이렇게 수학 공부가 하기 싫을까?
‘오늘은’ 이라고 해서 평소엔 괜찮고 특별히 오늘만 있는 일 같지만, 사실은 어제도 그랬고 지난주에도 몇 번은 뱉은 멘트다. 그래서 전날엔 부러 응원하는 편지도 써줬었다.
전 날 팔만대장경급의 편지를 써줬대도 방법이 없다. 엄마는 다 까먹은 척, 놀란 척을 해주는 수 밖에. 성질나는 대로 "너느은 애가! 어제도!!!" 로 시작하는 일장 연설을 하면 아마 우리는 오늘 절교를 하게 되겠지.
팔자에 없는 연기혼을 동공과 세포 하나하나에 담아 불살랐다.
- 어머? 그래? 오늘은 수학이 하기 싫은 날이야? (생전 없었던 일인 것처럼 혼신을 다해 연기 해야한다)
그런 날이 있어. 엄마도 청소가 너무 귀찮은 날은 에잇 하루 그냥 푹 쉬고 다음 날 해. 청소기도 베터리가 다 되면 움직이질 못하는데 사람이 로봇도 아니고 어떻게 매일 웃으면서 어려운 공부를 계속 하겠어? 우리 딸이 학교에서 너무 열심히 하고와서 베터리가 방전됐나보다. 에이, 엄마랑 침대에서 껴안고 낮잠이나 자고 오늘은 땡땡이치자!
내 말이 끝나고도 애매한 표정을 짓고 쭈뼛거리던 아이가 몇 번 더 권하니 찝찝한 표정으로 이불 속에 파고 들어와 품에 안겼다. 쪼끄만 머리통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엄마 눈엔 작기만 한 애가 뭐가 그리 찝찝한지 입술까지 삐뚤게 오물거리면서 고뇌하는게 우습기도 귀엽기도 했다.
- 하지마! 오늘은 진짜 수학 하지마! 수학천재 오늘은 쉬어! (다른 건 몰라도 현재 수학 천재는 절대 아니다. 10가르기 이해를 잘 못해서 여러번 반복하고 여러권 풀고 있는, 엄마닮아 파워문과형 딸.)
한숨 자고 일어나서 오늘은 그냥 놀자! 자고 일어나면 컨디션도 좋아지고 기분도 좋아질거야. 아니면 이따 같이 떡볶이재료 장보러 가는 건 어때?
평화롭게 팔베개를 해서 안아주고 배도 문질문질 해주면서 좋은 연주곡 유튜브를 같이 보는데 갑자기 엄마!!! 부르면서 뒤돌아 나를 다급하게 쳐다본다.
- 엄마 나 방금 누가 스위치를 눌렀나봐!
갑자기 파워충전됐어! 수학천재모드야!
공부하고올게!
‘오예’를 숨기고 괜히 아쉬운 척 연기를 한다.
- 아아~ 왜~ 안고 같이 연주 보다가 자자아아~ 좋았는데에에~ (웃음은 참아야 한다. 필사적으로)
이번엔 갑자기 아이가 엄청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토닥토닥 해준다.
- 아이고 우리 엄마 졸려? 좀 자고있어~ 내가 수학 풀고 와서 깨워줄게!
잠깐사이 한 뼘 자란듯한 뒷모습으로 방을 나선다. 어깨 위에 자부심이 한껏 올라간 뒷모습이다.
몰래 미어캣처럼 방 곁으로 가서 들어보니 완전히 기분이 좋아졌는지 콧노래까지 알수없는 멜로디를 흥얼흥얼거리고 시키지도 않은 영어성경 CD까지 틀어놓고 열공을 한다.
청개구리는 유전인가보다. 생각해보면 나도 그랬다. 아무 기대 없는 척, 포기를 종용하는 듯한 부모님의 태도에 괜히 더 화이팅하게 되는 마음, 뭔가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물론 그 때의 부모님도 나처럼 속셈을 가지고 연기를 하셨겠지.
아! 하지 말라니까 더 열심히 하는 아이를 보다보니 오늘은 남편에게 팁을 하나 줘야겠다.
여보, 앞으로 나한테 운동하지 말라고 해볼래?
그럼 혹시 알아? 자면서도 플랭크할지.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