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시간의 예술

by 미들

난 그녀의 피아노 연주를 좋아했다. 그녀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맑고 경쾌한 선율들이 좋았다. 검고 하얀 단순한 건반들이 만들어내는 놀랍도록 경이로운 소리가 좋았다. 톡톡 튀는 리듬위를 살짝 덮고 있는 우아한 멜로디들이 자아내는 감정들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뭐 듣고 싶은거 있어?”

“이루마.”


그녀가 다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고, 난 눈을 감았다. 난 그녀가 치고 있는 그랜드 피아노 위에 누워 그녀의 연주를 즐기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면 펄쩍 뛰며 난리칠 사람도 있겠지만, 알게뭐람. 여기만큼 피아노 연주를 가까이서 들을 수 있는 장소는 없다. 한동안 피아노 연주만이 우리 둘 사이에서 울려퍼졌다. 그녀가 건반을 지그시 누르는 느낌, 그녀의 발이 페달을 밟았다 떼는 느낌, 그녀가 음악을 연주하는 한순간 한순간이 나에게로 다가왔다.


“좋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살짝 뜨자, 그녀가 작게 웃고 있었다.


“피아니스트든, 글을 쓰는 작가든, 그림을 그리는 화가든, 모든 예술가들이 진정으로 필요한게 뭔지 알아?”


그녀가 연주를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연주중에 말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술의 재능?”

“아니, 자신의 작품을 진심으로 즐겨주는 관객.”


그녀의 연주가 조금 누그러졌다. 나는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운이 좋아, 네가 있잖아.”


그녀가 속삭였다. 피아노 소리에 묻혀버렸지만 나는 똑똑히 들었다.


“운은 내가 좋지, 이 연주를 이런 VIP석에서 들을 수 있는데.”


그녀의 연주가 경쾌해졌다가, 이내 약해졌다. 원래는 건반 위에서 통통 튀어다니며 경쾌한 리듬을 연주해야하는 부분도 부드러운 레가토로 넘어갔다. 나는 피아노 위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비록 악보와는 다를지언정, 음악은 계속 되었다. 자신만의 해석으로, 자신만의 리듬으로, 자신만의 멜로디로. 내가 수없이 들었던 곡이 그녀 자신의 음악으로 내 앞에서 변화해갔다. 나는 잠시 숨죽이고 연주를 감상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예술이었고, 음악이었으며, 그녀 자체였다. 곧 그녀가 마지막 음이 흘러나오던 건반에서 손가락을 뗐다.


“봐, 이 연주도.”
“응?”


그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아직 연주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내가 적절한 대답을 찾고 있는 사이 그녀가 다시 말했다.


“방금 연주, 아마 내 인생에서 한번 밖에 없는 연주였을거야. 다시는 재현하지 못할, 내 인생 유일무이한 연주.”

“굉장했어. 진짜로.”

“나도 알아.”


그래도 칭찬이 싫지는 않았는지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연주자는 불공평해. 작곡가는 악보가 남고, 화가는 그림이 남고, 작가는 글이 남아. 연주자는 뭐가 남지? 4분 남짓한 곡 하나를 연주하고 나면 남는게 없잖아.”

“녹음이라도 해놓으면…”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기계가 인위적으로 먹었다 뱉어내는 소리는 음악이 아니다. 방금 연주를 내가 녹음해뒀다가 나중에 듣는다해도, 지금 이 감정을 느끼는 일은 다시 없으리라. 그녀가 내 표정을 보고 웃음 지었다. 속마음을 들킨것 같아 부끄러웠다.


“누군가 내 연주를 듣는다고 해도 그 사람이 내 음악을 다 이해해줄거라는 보장도 없어. 곡이나 그림, 글은 많은 사람들이 회자하고 연구하며 창작자의 심리를, 담겨있는 의미를 알아내려고 애쓰잖아.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살을 덧붙여서 더 풍부하고 아름답게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고. 근데 나는…”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깨달은 내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그녀가 부끄러운듯 배시시 웃었다.


“네 방금 연주는 내가 들었어. 절대로 잊지 않을거야.”

“고마워.”


그리고 그녀는 손을 들어 다시 건반 위에 올려놓았다. 무언가 다른 곡을 치기를 잠시 기대했지만, 그녀는 아무 곡도 연주하지 않았다.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야.”


그녀가 말했다.


“5분, 길어도 15분 남짓한 시간이 지나야만 감상할 수 있는 예술. 이 세상 누가 와도 똑같은 시간을 투자해야만 만들어낼수 있고, 그만큼의 시간을 투자해야 감상할 수 있는 예술. 예술가와 관람객이 같은 시간을 공유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예술. 이런게 또 있을까?”


그녀가 건반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나는 작게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나지막이 대답했다.


“사랑?”

“첫눈에 반하는 사람들도 있어.”

“하지만 시간을 공유해야만 완성된다는 건 같지.”


그녀가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사랑이 예술일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녀는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천천히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나도 처음 듣는 곡이었다. 아마 그녀의 자작곡이리라. 낯선 멜로디가 피아노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곡을 감상했다. 아니, 곡을 감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감상하고 있는 것은 그녀였다. 그녀 자신이 악기에 담겨 멜로디와 리듬을 통해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그러다 갑자기 연주가 끊겼다.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미완성곡인 모양이었다. 나는 약간 심통이 나 있는듯한 그녀를 바라보다 피아노 위에서 내려와 그녀의 옆에 앉았다. 건반에 손가락을 올렸다.


연주를 시작했다. 모두가 아는 곡. 젓가락 행진곡의 반주 부분을 연주했다. 6마디를 넘게 연주했는데도 그녀가 멜로디를 연주해주지 않자 나는 그녀에게 눈을 흘겼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고 연주를 시작했다. 두사람의 음악이 섞여 하모니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넌 매일 이것만 치더라. 혹시 이거밖에 모르는 거 아냐?”

“이게 제일 좋아.”


우리는 잠시 대화를 멈추고 연주에 몰두했다. 단순한 곡이지만 흘러나오는 소리는 단순하지 않았다. 나는 반복되는 2마디의 단조로운 반주 안에 내 모든 것을 담으려 노력했다. 낮고 경쾌하게, 하지만 가볍지 않게. 그녀또한 내 모습을 보고 연주에 열중했다.


연주가 끝나자 나는 가볍게 숨을 몰아 쉬었다. 완전히 지쳐버렸다.


“진짜 이거 치고 지친거야?”

“이런 명연주를 펼쳤는데 당연하지.”


그렇게 얘기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는데, 그녀의 이마에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진심을 내주었다는 것이 기뻤다. 하지만 약간 불만족스러웠다. 아까 그녀의 자작곡만큼 나 자신이 담기지 않았다. 우리가 방금 한 것은 그저 좀 잘친 피아노 연주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아까 그 곡은 뭐야?”
“어? 아아, 완성되면, 그때 알려줄게.”


그녀가 내 눈을 피했다. 완성되지 않은 곡을 들려준 것이 부끄러운 것일까, 아니면?


“난 연탄곡이 좋아.”

“연탄곡이라 해봐야 젓가락 행진곡 밖에 모르잖아.”
“그럼 젓가락 행진곡이 좋아.”

“순 억지야.”

그녀가 톡 쏘아붙이고 피아노 위에 엎드렸다. 잠시 불협화음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가 이내 옅어졌다.


“네가 말한대로 음악이 시간의 예술이라면, 예술가와 관람객이 같은 시간을 공유해야하는 예술이라면 연탄곡은 그보다 한 단계 더 위에 있잖아. 예술가가 곧 관람객이 되는, 연주자가 곧 감상자가 되는 그런 음악. 두 사람이 하나의 곡에 맞추어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를 감상하고, 서로를 연주해주는 그런 음악. 이런게 또 있게?”

“사랑?”


그녀가 엎드린 채로 웅얼댔다. 표정을 보이기 싫어하는 것 같지만 귀가 빨갛다. 나는 웃음 터뜨렸다.


“아깐 아니라며?”

“그거야..뭐…”


그녀가 말을 흐렸다. 그녀는 음악과 함께가 아니라면 종종 이렇게 소심한 면모를 보이곤했다. 피아노를 연주하며 자신의 생각을 자신감 있게 풀어놓는 그녀는 가끔 낯설기까지 했다.


“피곤해졌어. 나 먼저 들어갈게.”

그녀는 피아노 뚜껑을 닫고 일어나 방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방안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피아노 뚜껑을 다시 열었다. 아직 그녀의 흔적이 남아있는 피아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나도 그런 음악을 연주하고 싶었다. 악기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고 싶었다. 사랑을 해보고 싶었다.


그녀의 미완성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조용히, 천천히. 한번밖에 못들어본 곡이라 자꾸만 연주가 끊겼다. 희미해져가는 기억을 억지로 되살려가며 피아노를 뚱땅거리고 있자, 언제 왔는지 그녀가 다시 내 옆에 앉았다.


“그게 아니라, 이렇게.”

그녀의 손끝에서 다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연주를 중단하고 그녀의 손가락에 집중했다. 그리고 한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연주했다. 이 곡이 미완성인 이유는 그녀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 사람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 곡은 연탄곡이다. 나는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코드를 찾아가며 한음 한음 정성들여 눌렀다. 그녀도 연주의 속도를 천천히 줄였다. 라르고.


신중했던 내 손가락이 점점 자신감을 찾아갔다. 모데라토. 알레그레토. 그녀는 내 연주에 맞춰주었고, 나도 그녀의 연주에 맞춰주었다. 이윽고 그녀가 연주를 멈추었던 부분에 다다랐지만 우리는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더이상 서로에게 맞춰줄 필요가 없었다. 내가 연주하는 멜로디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 똑같았고, 그녀의 자유분방한 손가락은 내가 머릿속에 그린 그대로 움직였다. 그녀는 나였고, 나는 그녀였다. 그 순간,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나는 점점 대담해졌고, 그녀도 나를 따라 연주의 속도를 높였다. 알레그로, 비바체. 연주는 격렬해졌고, 내 이마는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이윽고 연주가 절정에 이른 순간, 우리는 동시에 연주를 멈추었다.


“와, 진짜, 방금 그건…”

“나도 알아.”

우리가 음악을 통해 완벽하게 하나가 된 순간. 그건 마치 사랑처럼 깨끗했고, 섹스처럼 정열적이었으며, 배려만큼 자상했고, 시간만큼 절대적이었다. 눈을 감고 그녀에게 키스했다. 내 행동을 예상하지 못해 놀란 그녀가 건반을 팔꿈치로 누르는 바람에 듣기 싫은 불협화음이 생겼지만, 알게뭐람. 그또한 지금 이순간만큼은 훌륭한 음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