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애의 <조선 여성들의 밟을 길>을 읽으며

한국 근대 수필 산책 1

by 김태진

늦가을 오후, 바람이 유리창을 긁었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려놓고 책장을 훑던 내 손끝이 《중고등학생이 꼭 읽어야 할 한국대표수필 137선》의 한 페이지에서 멈췄다.

활자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묘하게도 내 시선을 붙잡았다. 강경애의 수필 〈조선 여성들의 밟을 길〉.


오래된 제목인데도 그 속에 흐르는 기운은 낯설지 않았다. 첫 문장을 읽자마자, 오래전 누군가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말을 거는 듯했다.


“독서, 이것이야말로 더욱 우리 여성들에게 필요하다.”


어찌 이 한 줄이 여성에게만 국한되랴!


내 마음을 찌르듯 들어왔다. 독서가 해방의 날개라는 선언. 단순히 책장을 넘기는 일이 아니라, 잠든 영혼을 깨우는 시작이라는 힘이 응축돼 있었다. 나는 잠시 책을 덮고 창밖의 회색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 오는 골목을 스치는 바람이 서늘하게 뺨을 스쳤다. 마치 그녀의 목소리가 90년의 시간을 건너와 내 어깨를 두드리는 것 같았다.


1930년대 조선.

식민지 통치와 가부장제가 겹겹이 드리워 여성의 발걸음은 집안일과 육아로만 한정되던 시절,

열악한 시대임에도 깨어 있는 여성으로서 강경애는 그 현실을 향해 단호히 외쳤다.


“우리 조선 여성들이여! 여성이라고 자포자기할 것이 아니다.”


직설적이면서도 따뜻한 이 호소는

오늘의 나에게도 여전히 날것의 전율을 전해 준다.


그녀의 문장은 마치 새벽의 바람이 잠든 마음을 흔들 듯 내 안의 굳은 껍질을 조용히 깨뜨렸다.


나는 그녀가 보여준 문장의 힘을 오래 음미했다.

짧지만 재치 있는 압축, 한순간에 이미지를 그려내는 비유, 그리고 무생물에 생기를 불어넣는 활유법.


‘독서는 여성의 숨은 날개다’라는 표현을 떠올리면, 내 안에서도 보이지 않는 날개가 꿈틀거리는 듯했다. 뿐만 아니다. 그녀의 글에는 감탄을 절로 부르게 하는 주옥같은 문장들이 숨어 있다.


“지식은 잠든 영혼을 흔드는 새벽의 바람이다”


라는 은유적 선언은 가슴을 쿵 하고 두드린다.


작가가 되고자 하는 이라면

이런 문장을 어떻게 다듬어야 하는지 배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책을 덮으며 문득 내 일상을 비춰보았다.

매일 이어가는 독서와 글쓰기,

때로는 새벽녘 깜빡이며 적어두는 짧은 문장 하나까지도 나를 일으키는 힘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강경애가 말한 독서와 학습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자기 목소리를 세상에 내는 가장 확실한 길임을

나는 조금씩 실감한다.


창밖 하늘이 붉게 물들 무렵,

나는 그녀가 남긴 마지막 질문을 조심스레 되뇌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방식으로 ‘독서’를 통해

자신과 사회를 동시에 바꾸고 있는가?”


이 물음은 오래 남아

내 하루의 빈틈을 은은히 채우고 있다.

오늘도 글을 읽고 쓰는 이 길 위에서

강경애는 여전히 우리를 다정히 재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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