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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Jun 18. 2024

사주에 불火이 많으면 예술가 팔자? (마지막회)

농담들 6 : 웃으면 안될

2에서 계속)


미국의 하늘은 더 파랗게 보였다. 

1년의 안식년을 얻은 우리부부는 우리집 초딩을 미국 초등학교에 전학 시키고 나서 고민에 빠졌다. 

안 그래도 바이올린 연습을 게을리하는데 어떻게 하면 주기적인 활동을 시킬 수 있을까?


미국에 오기전에 바이올린은 4분의 3 사이즈에서 풀사이즈로 바뀌었다. 신체 사이즈에 비해 바이올린이 조금 크기는 했지만 어차피 큰돈을 투자할 거면 더이상 바꾸지 않아도 되는 성인용 사이즈를 사야겠다는 경제적 판단 때문이었다. 참고로 바이올린 가격은 실력에 비례한다. 꽤 잘켜면 꽤 비싼 바이올린을 써야 한다.  


뭐 없나 여기저기 물어보다가 D대학 청소년 오케스트라가 마침 단원을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겁도 없이 오디션에 지원했다. 오디션을 담당한 선생님은 D대학 음대의 교수였는데 무슨 일인지 직접 오디션을 보겠다며 음악실로 우리를 불렀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여교수, 그분이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겸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됐다. 


음대교수는 한눈에 초딩의 몸집에 비해 바이올린이 큰 것을 알아 보고 눈쌀을 찌푸렸다. 그리고 건조한 표정을 지으며 해보라고 신호했다. 


"Ah, Haydn!"


무슨 곡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뭐든 연주해 보라는 말에 우리 초딩은 한국에서 연습하던 곡을 연주했는데 교수는 '뭐, 이정도면 괜찮네.' 라는 표정을 지었다. 뇌피셜이지만.

그리고 교수는 혹시 레슨이 필요하면 선생님을 소개시켜줄 수 있다고 해서 우리는 흔쾌히 고맙다고 했다. 


처음 만난 미국인 바이올린 선생님은 우리나라 선생님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허리를 빳빳이 세우라고 하지도 않았고 바이올린을 턱으로 죌 때도 편하게 하라면서 자세 교정에 치중하지 않았다. 그저 바이올린 소리에 좀 더 집중하고 애정하는 마음으로 바이올린을 안으면서, 활을 쓸 때 크게 휘저으라는 정도.. 


요약하면 소리만 잘 낼 수 있으면 맘대로 하라는 자유를 부여한 것이다. 사실 가르치는 철학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이전에 아들을 가르쳤던 한국인 선생님은 바른 자세에서 바른 소리가 나온다고 믿었던 것이다. 


아무튼 타고난 자유주의자인 울 아들은 부여된 자유를 맘껏 누리게 됐는데 레슨을 받을 때마다 실력이 쑥쑥 늘더니, D대학 청소년 오케스트라가 첫 공연을 시작할 때 퍼스트 바이올린 섹터에 배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게다가 학기가 끝나고 작은 음악회가 열렸는데 그때는 가장 어리다는 이유로 독주곡을 시연하는 특혜도 받았다. 그때 연주했던 것이 바흐였던가.. 


미국에서 연수가 끝날 때 즈음 우리집 초딩의 바이올린 실력은 나이에 비해 쫌 하는 수준에서 아주 잘하는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됐다. 혼자 방에서 연습할 때 훔쳐 들으면 집안에 음악가 난 줄.. 


"지금 저 곡은 뭐임?"

"몰라. 아무튼 어려운 거야."

"그래도 좋다. 음대를 노려야 하나?"

"돈 있어? 내가 모르게 꿍쳐 놓은 거라도 있어?"

"전혀."

"그럼 꿈깨."


귀국을 앞두고 우리는 샌프란시스코로 여행을 갔다. 대부분은 차를 타고 다녔지만 샌프란시스코의 명물인 언덕을 오르는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차를 주차해야 했다. 그러나 주차장은 보이지 않고 길거리 코인 주차구역을 발견했다. 


어차피 케이블카만 타고 오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것도 경험이라는 생각에서 차를 대고 케이블카를 타고왔다. 기껏해야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돌아왔을 때 우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보조석 유리창이 와장창 깨져 있었고 아내의 토드백과 아들의 바이올린이 통째로 사라진 것이다. 

아내의 가방은 싸구려에 내용물도 별 것 없었으니 재산상의 손실이 거의 없었지만, 바이올린은 달랐다. 


"이 도둑놈의 새끼들이 진짜."


전화로 경찰에 신고했더니 인터넷으로 사건을 접수하라고 냉랭이 대답했다. 잘 알아듣지도 못했다. 그 뒤에 있었던 일련의 귀찮은 일들은 생략하고 바이올린에만 집중하자면, 일단 되찾을 방법은 전혀 없었다. 

나중에 친구에게 들은 말이지만 길거리에 차를 주차하고 그 안에 귀중품을 보이게 둔 것은 완전 바보짓이며 99% 내 잘못이라는 것이다. 서부에서는 대시보드에 동전만 있어도 유리창을 깬다는... 과장이겠지?


전부 다 내 잘못이라하고,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바이올린 어떡해? 다시 사야하나?"

"돈 있어?"

"아니. 마이너스 대출이라도."

"그럼 이제 그만 할까?"


우리집 초딩의 음악 인생에 두 번째 위기가 닥쳤다. 바이올린을 도둑 맞았기 때문에 더는 바이올린을 할 수 없다는... ㅠㅠ

톡 까놓고 말하자면, 원래 예술가의 가장 큰 장벽은 경제적 비용문제이다. 이 점에서는 모짜르트와 베토벤도 피하지 못했다. No money, No Music -라임도 맞는다. 


꽹과리 파동 때와 달리 이번에는 우리집 초딩도 할 말은 하는 수준에 이르렀기에 자기 의사를 강력하게 피력했다.


"바이올린 사줄꺼지?"

"계속 하게?"

"응. 어차피 악기 하나는 해야 하잖아."

"그 악기가 꼭 바이올린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럼 뭐 해?"

"실로폰이라든가, 멜로디온?"

"장난치지 말고!"

"우리 다시 장구할까?"

"....."


다행스러운 것(?) 한가지는 우리 아들이 바이올린의 천재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모름지기 천재적 재능이라고 한다면 그 첫번 째는 좋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9살에 주빈 메타가 지휘하는 뉴욕필하모닉과 협연을 했던 장영주(사라 장)는 바이올린을 너무 좋아해서 꼬망이 시절부터 그녀의 손에서 바이올린을 떼놓는게 너무 힘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엄밀히 말해서 너는 그닥 바이올린을 좋아하지는 않자나?"

"좋아해!"

"우기지 말고. 바이올린으로 대학 갈 거야?"

"..."

"차분하게 다같이 고민 좀 해보자."

"아빠, 돈 없어서 그래?"


아, 자존심 긁히는 소리.. 내 마음에 큰 상처. 까짓 바이올린 하나 더 산다고 가세가 기우는 것도 아니고. 집 팔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바이올린 다시 사자. 내가 술 좀 안 마시면 되지."

"술 아예 끊어야 할 껄?"

"얼마나?"

"한 20년?"

"..."


한국에 돌아와 우리 부부는 결국 바이올린을 다시 구매했다. 잃어버린 것 보다 조금 싼 것으로. 

새로 산 바이올린으로 연습을 하던 우리 아들, 절대음감 소유자. 천재적 재능은 없으나 어정쩡한 재능의 보유자. 

한번 켜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아빠, 싼 거 샀지?"

"아니야! 같은 가격대야."

"소리가 좀 아닌 것 같은데."

"요즘 연습 못 해서 니 실력이 줄었나 보지. 좀 더 해봐. 아직 길이 덜 들어서 그럴 수도 있고."


아직도 그 바이올린은 길들이는 중이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바이올린 연습할 시간이 적기도 했고, 음대 갈 것도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대학 가보니 취미로 바이올린 한다는 애들의 수준이 이미 연주자급이었다. 

역시 우리부부의 판단은 옳았다. 

 


사주에 불火 많다고 무조건 예술가 팔자는 아닌듯요. 

웃자고 쓴 이야기입니다. 다큐로 받지 마시길. 


기억은 왜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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