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야화>와 세헤라자데
내가 자주 가는 제과점의 건너편에는 사보텐이라는 돈까스 전문점이 있다. 그 앞에는 승용차 4대 정도를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한쪽 귀퉁이에 조그만 노인이 항상 앉아 있다.
서늘한 에어컨이 작동하는 제과점 안쪽에서 바깥의 앉은 노인을 쳐다보는데, 보는 내가 덥고 힘들다. 여름 한낮의 바깥은 말 그대로 열지옥이다. 그럼에도 노인은 하얀 마스크를 굳게 착용하고 브랜드를 알 수 없는 야구모자를 눌러썼다. 자기를 못 알아보게 할 목적인가?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며 한참을 보는 동안 노인은 한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조그만 선풍기가 그의 등 뒤에서 더운 바람을 쏘아 대지만 시원할 리가 없다. 그건 그냥 음식점 측에서 할 도리는 한다는 최소한의 성의를 보인 것 같았다.
노인의 업무는 음식점을 찾은 손님들의 차를 발렛파킹해 주는 것이다. 다행인지 몰라도 손님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노인의 일은 주로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손님과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올 무엇인가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동안 노인이 무엇을 하는고 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노인은 그저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행색으로 보아 발렛파킹 일이 꼭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다. 지나가다 들어보니 목소리는 점잖고 나름 절도가 있어 은퇴 전에는 꽤 괜찮은 직장에서 일했을 것 같다는 추측을 했다. 게다가 노인이 쓰는 앉은뱅이 책상에 책이 한 권 펼쳐져 있었다. 잘 읽지는 않았지만.
그 책은 <천일야화>였다.
천일야화? 왜 하필 천일야화지? 옆에서서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아내의 배신에 분노한 샤흐리아르 왕은 매일 새로운 여자와 결혼하고 다음날 부인을 처형하길 반복한다. 왕의 엽기적인 행각에 온 나라가 두려움에 떨자 지혜로운 세헤라자데가 왕비를 자청한다. 세헤라자데는 처형을 피하기 위해 밤새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왕은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며 계속 세헤라자데를 살려둔다. 그렇게 천일의 밤이 계속된다는 환상적인 이야기. 아라비안 나이트.
신밧드는 일곱 번의 항해를 통해 신기한 모험을 하게 된다. 모험이 거듭될 때마다 신밧드는 엄청난 부富를 얻지만 곧이은 재난에 부를 다 잃고 목숨마저 위협 당한다. 거대한 고래, 왕뱀, 새, 거인, 하나같이 신밧드의 자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연재해급의 위기인데 그를 벗어나게 해주는 것은 약간의 기지와 대부분의 행운이었다.
신밧드의 모험은 그저 흥미진진한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세헤라자데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인생이 덧없으며 부와 권력은 그보다 더 허망하다는 것이다. 1000일이 지나 샤흐리아르 왕이 부인을 죽이는 못된 행위를 그만두게 된 것도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서 아니다.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 자기의 권력과 삶이 얼마나 보잘 것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부분 초등학교 시절 천일야화를 동화로 읽지만 실제 이 스토리가 필요한 사람은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삶은 짧다. 동시에 지루하다. 짧고 지루한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노인이 되면 살아갈 날이 적어 분초가 아까울 것 같은데 시간을 보람차게 보내기는 쉽지 않다.
무엇을 할 것인가? 직장은 은퇴했고, 부업을 찾기는 절대 쉽지 않다. 돈은 되지 않아도 소일거리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뭘 알아야 소일을 하고 즐길 것 아니냐?
목공방을 기웃거리고, 그림을 그려볼까, 악기를 배워볼까? 말은 쉬워도 이 역시 버티는 일이다. 아, 내가 이 나이 먹어서 또 뭘 배워야 한다니.. 돈도 되지 않을 일을... 돈 아깝게...
그래서 가만히 있는다. 점점 멍때리는 시간이 길어지고 심지어 지루하지도 않다. 지루하다는 감정마저 지루해진 것이다.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서 푸네스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그래서 어제 뭐했는지를 생각하면서 하루를 보낼 수 있다. 대단한 일이 아니라도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했던, 심지어 생각했던 일까지 모조리 기억하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전날을 되새기는데 걸리는 시간이 부족해서 잠을 잘 수조차 없다. -최소한 지루한 일은 없을 것 같다.
만약 푸네스가 일기를 쓴다면 하루의 일만 가지고도 책 한권은 거뜬히 쓸 것이다.
꽤 오래 전부터 나는 매일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나의 하루가 그냥 없어지는 것 같아서 나라도 기록해 두려는 목적이었다. 처음에는 쓸 게 너무 많아서 일기가 단편소설 수준이었다. 인생도 다이내믹하고 사건도 많고 기쁜 일, 슬픈 일, 화나는 일, 좋아하고 싫어하고 증오하고, 쓸 거리는 넘쳐났다.
그러나 줄어들었다. 줄어들고 있다. 요즘 내 일기는 한 페이지를 넘기 힘들다. 매일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생활은 루틴에 빠지고 만나는 사람은 줄었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화나는 일도 자주 생기지 않는다. 감정의 기복도 적어서 매일의 시간에서 비슷한 맛이 난다.
요즘 나에게 인생은 짧고 지루한 영화 같다. 차이가 있다면 영화가 끝날 때까지 영화관을 나갈 수 없다.
노인은 <천일야화>를 읽고 있었다. 제대로 골랐다.
노인은 그저 앞을 보고 있다. 앞에는 확실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 다가오고 있다. 노인은 직감적으로 그것이 다가오는 것을 알기에 쳐다보는 것이다.
점묘 추상화의 대가 김환기 화백은 죽기 얼마 전까지 커다란 캔버스에 검은 점을 찍었다. 건강이 악화될수록 매일 찍을 수 있는 점의 숫자는 줄어들었다. 그 점들의 순환은 그가 살아온 인생의 궤적을 상징한다.
나의 일기는 줄어들고 있다.
일기 쓸 것이 점점 줄어서 나중에는 한 자도 쓰지 못하는 순간이 올것 같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서 글로 옮길 것이 없는 것이다.
죽음이 다가오면 인생의 회한 같은 것이 있겠지만, 그 회한을 떠올리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글로 옮길 수 없을 만큼 무력해진다면, 한 글자를 글로 옮겨 적는 것도 귀찮아질 것이다.
그러면 어떡하지?
내가 쓸 마지막 문장은 어떤 것일까? 마지막 글자는 뭘까? 미리 생각해 두어야 하나..
죽음만큼 확실하게 그러나 보이지 않게 다가오는 것은 없다.
지인의 아버지가 아흔이 넘었는데 죽기 전날까지 5000보 산책을 했다는 말을 듣고 인생의 목표가 바뀌었다.
'죽기 전날까지 내 발로 걷는다.'
단지 건강과 하체근육의 문제가 아니다. 걷고 싶은 욕망, 그것을 시행할 수 있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무력감에 빠지지 말아야 하고, 무엇보다 죽음을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기다리는 것은 더더욱.
"심연을 들여다 보면 심연도 나를 들여다 본다."
-프리드리히 니체
지당하신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