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리지도 않고 매일 하는 일이야 한두 개가 아니다만, 그중 운전은 좀 특별하다.
아침 저녁으로 꼬박 20km 씩, 꽤 긴 출퇴근 길이다. 먹고 살자니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지만 어떤 날은 운전 때문에 그나마 출근이 할 만하다. 또 어떤 날은 운전 때문에 퇴근이 싫기도 하다.
생각없이 오직 운전만 하는 게 좋아서 여수까지 드라이브를 다녀오기도 했다. 올라 올 때는 졸려서 후회했지만 내가 하는 후회가 어디 그거 하나뿐이랴. 살면서 한 바보짓들을 하나하나 다 떠올려 보면 그냥 죽는 게 낫지 싶다.
운전은 정신을 또렷이 차리고 하는 것 같지만 대부분은 자전거 타는 것과 같이 무의식이 알아서 한다. 엑셀에서 발을 떼고 브레이크를 밟았다가 깜박이를 넣고 핸들을 튼다. 내 의식은 이 과정의 각 단계에 개입하지 않으며 일일이 개입할 능력도 없다.
특히 돌발 상황이 나타나 급브레이크를 밟을 때는 판단이고 뭐고 없다. 일단 밟고 나서 사건의 전후상황을 내 의식이 보고 받는 수준이다. '큰 일 날뻔 했내. 잘했어!‘
성격상 과속카메라를 무서워하는 나는 카메라만 보이면 의식적으로 속도를 낮추고 속도계를 흘끗거리며 천천히 진행하지만 가끔은 멍 때리며 지나친다. 그럴 때는 '내가 몇 킬로로 지나갔지?' 하며 불안에 떠는데 단 한번도 무의식이 나를 배신한 적은 없다. 무씨 성을 가진 그는 철두철미한데다 터미네이터처럼 냉철해서 실수하지 않는다. 실수하는 쪽은 오히려 내 의식이다. 그냥 두면 될 일을 꼭 개입해서 일을 엉망으로 만든다.
안 해도 되는 걱정,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대비 등은 내 의식이 벌이는 대표적인 기력 낭비다. 반면 힘들어도 운동하기, 다 먹을 수 있어도 그만 먹기 등은 칭찬할 만한 의식의 과업이다.
몇몇 긍정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의식을 나무라고 싶다. 원치 않는 잔소리를 하거나 남의 일에 끼어드는 것, 되지도 않을 공모전에 응모하는 등 대부분의 후회를 생산하는 것은 모두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동안 의식을 나무라지 않았던 이유는 의식이 '나'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식이 진정한 '나'가 아니라면?
다른 글에서도 인용했지만, 최근 뇌과학 실험에서 어떤 동작을 행할 때 뇌의 지령신호가 의식보다 먼저 포착된다는 사실이 입증됐다. 물론 이 같은 실험 결과가 꼭 의식의 자율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실험이 잘못됐을 수도 있고, 인간의 행위는 단순히 탁구공을 집어 드는 것보다 다양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의식과 의식에 관한 세 가지의 가설을 세워 볼 수 있다.
1. 의식이 무의식을 지배한다.
2. 무의식이 의식에 선행한다.
3. 의식과 무의식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1. 의식이 무의식을 지배한다는 가설은 의식의 반복적인 단련에 의해 무의식이 생성된다는 것이다. 나는 운전을 처음부터 잘하지 않았다. 운전 스킬을 배우고 반복하면서 운전하는 무의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모든 무의식이 의식으로부터 생기지는 않았다. 위기의 순간 핸들을 왼쪽으로 꺾어 큰 사고를 피했다고 할 때, 생명을 구한 무의식의 행위는 과연 학습된 것일까? 그전에는 단 한번도 사고를 경험해보지 않았는데 말이다.
몽유병이나 멍때리기 등 운전 이외의 많은 무의식적 행위들을 생각해보면 의식이 지배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죽하면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을까? 그러나 무의식 역시 뇌의 활동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나'의 활동이다.
2. 무의식이 의식에 선행한다는 가설은 나 모르게 일어나는 여러가지 '내 행위'들을 설명해 주지만 반박하기 힘든 반증에 맞닥뜨린다. 예를 들어 독립투사가 일본경찰의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는 상황을 가정하자. 고문을 이겨는 의지가 의식의 활동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입을 열고 싶지만 내 의식은 입을 꽉 다물라고 명령한다. 이러한 의식은 꽤 지배적이다. 하기 싫은 공부를 한다든가 보기 싫은 상사에게 허리를 굽히는 행위도 모두 의식이 시키는 명령이다. 이러한 의식에 선행하는 무의식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어떤 무의식이 의식보다 선행한다면 나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의식에 선행하는 무의식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하나? 선험적 의지? 무의식적 의지?
무의식이 의식 보다 종종 선행하기는 하지만 항상은 아니다. 또한 의식은 모든 무의식을 지배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의식과 무의식은 서로 무관한 별개의 것인가? 서로 영향을 주니 완전히 별개는 아니다. 그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세 번째 가설이 성립된다.
3. 의식과 무의식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다르게 보이지만 근원이 같다. 조금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Dasein(내가 여기 있음)이라는 하나의 존재에서 발생하는 두 가지 정신현상이다. 오케이. 여기까지는 반박하기 어렵다. 그러면 질문, 의식과 무의식 중 누가 '나'인가? 내 영혼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
영화 <인셉션>을 보면, 꿈 설계자가 만든 꿈 속 공간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그 꿈에 초대된 타겟의 무의식이다. 이런 설정은 의식이 통제하지 못하는 두뇌활동의 나머지 영역을 무의식이 채운다는 가설에 기반한다. 이 가설에 따르면 의식은 두뇌의 일부분밖에 사용하지 못하지만 무의식은 두뇌의 대부분을 넘나든다.
예를 들어 길을 걸어가며 시각에 입력된 수 많은 정보 중에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지만 무의식은 그 많은 정보를 모두 간직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최면을 통해 기억하지 못했던 과거를 끄집어 낼 수 있다는 것도 이러한 가설에 기반한다.
소설을 쓰다보면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문장이나 표현이 툭하고 튀어나올 때가 있다.
'신이여, 정녕 이게 내가 쓴 것입니까?'
농담처럼 하는 말처럼 들려도 창작자 입장에서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완벽한 결과물. 그건 무의식이 해낸 것이다. 그렇기에 기발한 착상이나 아이디어를 '영감'이라 표현하며 신의 간섭으로 여긴다.
무의식은 '나'인가, 아닌가?
다중 자아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자아는 본질적으로 다중적이다. 꿈속에서 자아가 3인칭으로 경험되거나 전혀 다른 인격처럼 행동하는 것도 다중 자아 이론을 뒷받침한다. 깨어있을 때도 사회적 역할이나 심리적 상태에 따라 다른 자아를 경험한다. 게다가 나의 다른(another) 자아는 현실에서 환각으로 체험되기도 한다.
영화 <블랙스완>을 보면, 발레 <백조의 호수>에서 주연을 맡은 니나가 흑조 연기에 집착한 나머지 자아가 분열되고 다른 자아와 갈등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두운 골목에서 자신을 스윽 쳐다보고 지나가는 관능적인 여인, 거울 안에서 나와는 다르게 움직이는 자유분방한 발레리나, 니나는 환각으로 육화된 다른 자아와 함께 술을 마시고 약에 취하고 잠자리를 같이 하는가 하면, 심한 몸싸움 끝에 깨진 유리로 치명상을 입히기도 한다.
겉보기에 분열된 자아는 니나의 일상을 망치는 것 같지만 발레리나로서의 니나를 완벽하게 만든다. 니나에게 없는 관능과 자유분방함으로 개막 무대에서 완벽한 흑조 연기를 선보인 것이다. 잠재돼 있었던 무의식이 전면에 나섬으로써 이전까지의 니나는 결코 할 수 없었던 경지에 도달하게 만들었다. 바로 완벽함!
신의 도움, 신의 개입, 신의 간섭으로 여겼던 '보이지 않는 손'은 사실 무의식이 성취한 과업일 때가 많다. 바르게 걷는 일, 소화시키는 일, 병균과 싸우고 내 몸을 위기에서 지키는 일 등 일상에서 무의식은 의식보다 훨씬 많은 일을 수행하고 있고 동시에 그만큼 유능하다.
게다가 길들여지기 전까지는 규율을 따르지 않고 뭐든지 생각해내며 제약없이 자유롭다.
내가 자유롭다면 그건 무의식일뿐이다.
그러나 무의식은 말그대로 무의식, 통제할 수 없다. 원한다고 불러낼 수 없고 아무 때나 일을 맡길 수도 없다. 그리하여 술이나 약에 취해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을 추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 생긴다. 무의식이 뭔가 해주길 기대하면서.
개인적으로 나는 취중진담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취해서 하는 말이 어떻게 진심인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이것저것 고려하고 이성의 정제를 거쳐서 나오는 말이 진심이라 생각했다.
취중에 던지는 말은 일종의 무의식이 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내 속에 있는 수많은 '나' 중에 하나, 혹은 여럿, 그렇기 때문에 진심까지는 아니라도 하나의 의견은 맞다. 무의식의 의견.
무의식은 온전한 내가 아니지만 '나'라는 사건의 현상인 것은 맞다. 확실하다. 내 무의식이 내가 아니라면 그럼 누구란 말인가? 다만 이제와서 이런 의심이 든다.
혹시 무의식이 진짜 주인 아닐까? 내 영혼의 주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의식은 무의식의 일부 또는 특별한 부분이 아닐까? 이제껏 주인도 아닌 녀석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지 않았나?
의식이라는 놈은 태생부터 이기적이어서 저만 알고 저만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스스로 전부라 생각하는데 '내가 제일 중요한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나 역시 의식이 생겨나면서부터 의식이 '나'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의식이 내가 아니라면? 실제 나를 통제하는 건 무의식이라면.. 통제라는 표현이 거슬리면 이렇게 말해보자. 나를 살게 하는 것이 무의식이라면?
인간의 의식은 사회적 관계가 없다면 효용이 급격히 떨어진다. 자연 속에서 혼자 뛰어놀고 산다면 의식이 할 일이라는 게 딱히 없다. 언어를 사용할 일이 없으니 언어적 생각을 하지 않고, 애초에 언어를 배우지 못했다면 의식적인 행위와 무의식적인 행위를 구분하기 어렵다.
무의식은 자유롭다. 그 자유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 의식이다. 의식이 깨어있는 한 무의식은 사사건건 의식의 간섭을 받는다. 그리고 의식이 잠들고 나서야 은연중에 그 본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무의식은 결정적인 한방이 있다. 간혹 삶이 지나치게 가혹해 의식이 견뎌내지 못하는 것 같으면 무의식은 기억을 싸그리 지워 의식을 초기화하거나(기억상실증) 아예 다른 의식을 대표인격으로 내세운다. 다중인격이 그 사례다. 그럴듯하지 않나?
의식의 가장 긍정적인 효용은 사회적 관계에서 발현된다. 가족, 직장, 모임 등 모두 의식적인 행위가 필요한 사회적 관계들이다. 어떤 면에서 본심이 아닌 가식적인 행위들이다. 예의를 갖추고, 룰을 따르고, 상대를 배려하고, 그러다 속이고 배신하고.
정치, 교육, 문화 등 사회제도가 고도화됨에 따라 의식적 행위의 중요성이 점점 커졌다. 무의식이 설 자리가 적어졌다. 그래서 생각 없는 '무의식'이라는 말로 격하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의식이 주인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점점 무의식이 내 영혼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나는 의식적으로 무의식을 억누르려하지만 결국은 무의식이 하고자 하는 것을 따른다. 파란하늘과 그 위의 흰구름을 좋아하고, 콘트랄토의 여성 목소리에 끌리며, 제과점 진열대 위의 크림빵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무의식이 수행하는 일이 100이라면 의식이 하는 일은 1이 되지 못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의식이 벌이는 수많은 기행에 괴로워하고 긴장하고 불안해 한다. 되지도 않을 생각과 걱정을 하면서...
의식은 그저 내 영혼에 더부살이하면서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룸펜일 뿐이다. 쓸모없는 온갖 지식을 머리에 담고 스스로 함정에 빠지며 허무와 절망이라는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무의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그는 언어로 소통하지 않지만 내 영혼의 주인다운 확고부동함으로 맞는 방향과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기차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 줄 것이지만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
그곳은 내 영혼의 주인이 이끄는 곳이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원하나? 그것은 자유.
그렇다면 더더욱 무의식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자유야 말로 무의식의 본질이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
-니코스 카잔차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