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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Sep 16. 2024

인생은 깨지 않는 꿈과 같다.

월요일 아침, 출근하려 보니까 차 앞유리에 잔뜩 익은 감이 떨어져 엉망이었다. 주변에 감나무도 없는데 까치가 먹으려고 들고 날아가다가 떨어뜨린 것이 아니면, 어떤 인간이 악의적으로 던진 것이다. 

얼마나 난장을 쳤는지 그냥 두고 운전하기도 어려워 대강이라도 닦아내야 했다. 끈적끈적한 감은 물티슈로 닦이지 않고 워셔액 반통을 쓰며 와이퍼를 휘저어도 큰 효과가 없었다. 여기서 15분. 

결국 지각으로 출근해서 뜨거운 물을 들고 내려갔다. 그러나 부주의로 텀블러를 쏟았고 한번 더 사무실을 왕복해야 했다. 이렇게 40분. 거의 1시간이 낭비됐다. 화났다. 


내가 화난 이유는 장난이든 뭐든 감 테러를 일으킨 인간에 대한 혐오보다 내 시간이 쓸모없이 버려졌다는 것이 컸다. 누가 무슨 권리로 내 인생을 낭비하나? 


나는 내 인생이 1분 1초도 헛되이 쓰이지 않길 바랬다. 그리하여 모든 시간이 의미있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애초에 불가능한 목표였다. 내가 성실하지 못 해서가 아니다.


현실과 꿈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꿈이 제멋대로고 일관성 없다는 것을 빼고, 너무 생생해서 현실과 구분하지 못할 정도라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 


영화 <인셉션>에서 코브와 멜은 꿈 속의, 꿈 속의, 꿈으로 빠져든다. 꿈의 심연 속에서 그 둘은 자기들만의 세상을 건설하고 평화롭게 무려 50년을 산다. 아무리 꿈이라도 50년을 살다보니 그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렵고 코브가 현실로 돌아가자고 하자 멜은 그곳이 현실이라며 안 돌아가겠다고 버틴다. 


장자는 <호접몽>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자유롭게 노닐다가 깼는데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장자가 된 꿈을 꾸는 것인지 모르겠더라.’ 장자가 나비꿈을 꾼 것과 나비가 장자꿈을 꾼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의 실존적 선택은 고통스럽지만 진실의 빨간 약을 먹을 것이냐, 평안한 삶을 보장하는 파란 약을 먹을 것이냐로 비롯된다. 매트릭스 속의 세상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현실에 비할 바 없이 안온하다면 굳이 지옥 같은 현실에 돌아올 이유가 있을까? 


다행스러운 일일지 몰라도 아직 현실과 구분하지 못할 정도의 꿈을 꾸게 하거나 가상현실을 경험할 수 있는 기술은 발명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나,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분명히 현실을 경험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같은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의미. 


꿈은 아무 의미없다. 꿈속에서 로또 1등에 당첨됐건 사랑에 빠졌건 대통령이 됐든 간에 깨어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손톱 밑에 상처만 나도 큰 의미다. 출근 전 보았던 와이프의 피곤한 얼굴이 신경 쓰이고, 이번 달 내야 할 자식의 등록금과 자동차 보험료를 어떻게 충당할지 고민한다.


그러나 돌려 생각하면 이런 것들도 모두 별 거 아니다. 내 생존에 큰 지장없다. 내 삶의 의미는 더더욱 아니다. 


내 삶의 의미는 뭘까? 나는 왜 살고 있을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미리 말하지만 답은 아직 찾지 못했다.           


철학을 전공했지만 묻지 말라는 힐난만 들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인생의 의미 같은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다. 인간의 언어라는 게 임의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인생'이니 ‘의미'니 모두 지시 대상이 명확치 않은 의미없는 단어일 수 있고, 의미없는 단어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질문에 정답이 있을 수 없다. 


더구나 꽤 많은 사람들이 묻지조차 않는다. 먹고 살기 바쁜데 한가한 소리 말라고 한다. 그렇다는 것은 인생은 의미가 없거나 있어도 알 필요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문제다. 인생의 의미가 알 필요 없을 만큼 중요하지 않다면 현실이 꿈과 뭐 그리 다른가? 

삶의 의미가 없다면 심각하게 고민하고 살 것도 없지 않나? 열심히 사는 것과는 별개 문제다. 이왕 사는 거 잘 사는 게 좋으니 대가를 얻기 위해 노력할 수 있지만 고뇌는 무용하다. 

더불어 정의니, 선善이니 하는 것도 의미없다. 인생에 의미가 없는데 정의는 적당히 피하거나 이용하면 되는 가치이고, 선은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나름 아닐까? 하물며 진심 따위를 어디에 쓸 것인가? 


의미가 없다면 인생은 깨지 않는 꿈과 같다. 깨어나서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차이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 할 수 있다면 유유자적하며 열대 섬의 휴양지를 거닐 듯 느리고 평온하게 살아도 된다.


카뮤의 <이방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천천히 가면 일사병에 걸려요. 그렇다고 너무 빨리 가면 땀을 많이 흘려서 성당 안에서 오한이 나게 되지요.”    

뭐 어쩌라고? 정답은 '적당히'다. 인생을 너무 느리게 살면 경쟁에 뒤쳐져 삶 자체가 고단해진다. 그렇다고 너무 빨리 치고나가면 결국 사단이 나고 틀어진다.

의미를 찾는 일도 비슷하다.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삶의 의미가 있다면 좋겠지만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저 내가 만족하고 살아갈 수 있는 '의미'면 적당하다. 


인생은 대하大河와 같아서 매달릴 곳이 없으면 떠내려간다. 


떠내려가지 않게 그저 매달릴 것을 찾기만 해도 좋을 것 같다. 삶의 의미는 그런 것이다. 만약 끝까지 못 찾겠거든 남는 방법은 하나다. 만든다. 살아갈 이유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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