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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Sep 23. 2024

망하는 거,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이 바닥이라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한 바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벌써 몇 년전 이야기다.

나는 내가 바닥이라 생각했는데 나보다 더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실은 꽤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외면하고 있었을 뿐.


내 상처가 너무 커서 남의 상처를 보기 싫었다. 누구나 그렇듯 나에게도 내 삶이 가장 애틋하다. 왜 이것밖에 되지 못했는지, 나는 왜 이 모양인지, 매일 나를 탓하다 보니 남을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생일이 돌아오는 게 무서웠다. 


"만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윤동주는 겨우 스물 네살에 깨달은 것을 나는 두 배가 넘는 나이에도 그 소리를 해대고 있다. 이제 나는 잊히길 바란다. 내 생일이 잊히길 바라고 내 삶이 통채로 잊히길 바란다. 그게 내 생일의 의미다.  


누구나 무너지고, 무너지는데 필요한 시간은 1초면 충분하다. 어느 날, 온갖 잡다한 생각에 떠밀려 퇴근해 보니 재활용 쓰레기가 가득 차 있었다. 주섬주섬 박스에 담아 양 손 가득 들고 나가는데 엘리베이터를 누를 손이 없다. 그러다 박스가 찢어졌다. 캔이며 물병이며 플라스틱이며 온갖 버려진 것들이 바닥에 쏟아지는데, 그토록 견뎌왔던 내 삶이 딱 거기서 무너졌다. 와르르. 


“왜 자꾸 태어나는 걸까요?”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여주인공 지안은 이렇게 묻는다. 매일이 똑같고 희망없는 사람들, 지옥 같은 현실을 견디는 사람들은 당연히 물을 법 할 질문이다. 좋지도 않은 세상에 왜 자꾸 존재하는 걸까? 묻지 않으면 좋겠지만 존재의 이유나 의미를 찾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를 특별히 다자인(Dasein), 현존재라 칭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경험하고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 존재를 이해하는 인간, 다자인. 그러나 이런 철학적 대답으로 무슨 위로가 될까? 


<나의 아저씨>의 무대는 낙후된 서울의 외곽 ‘정희네'라는 동네술집이다. 그곳에 밤마다 모여 앉아 소줏잔을 기울이는 초중고 동창들, 그중 안 어울리는 여자가 하나 있는데 최유라라 불리는 여배우다. 도대체 그녀는 왜 어울리지도 않는 술집에서 한물간 중년 아저씨들과 어울리고 있는 것일까?   


“전 망가진게 좋아요.”


은행 부원장이었다가 지금은 모텔에 수건 대며 살고, 자동차연구소 소장이었다가 미꾸라지를 수입하고, 제약회사 이사였다가 현재 백수.  온통 망가진 사람들 앞에서 최유라는 거침이 없다. 욕을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데 망가진 게 좋다는 그녀의 해명이 매력적이다. 


“망해도 괜찮은 거구나.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망가져도 행복할 수 있구나. 안심이 됐어요..”


우리는 평생 망가지고 실패할 것을 두려워하며 산다. 성공은 계속 해야하지만 실패는 한번만 해도 실패다. 그래서 누구나 실패하고 실패하는 사람이 더 많다. 에피쿠루스 학파는 행복의 핵심이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쾌락이 감각적 쾌락이 아니라 정신적 평온 상태, 아타락시아라고 말했는데 필요하지 않은 욕망을 줄일 때 달성 가능하다. 이들에 따르면 성공이나 실패는 행복을 결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실패해도 마음으로 행복하라? 맞는 말 같지만 너무 뻔하고 옛날 말씀이어서 와 닿지 않는다. 


그러면 요즘 말로 정신승리는 어떤가? 

우리가 흔히 자기합리화로 치부하는 정신승리는 나름의 이론적 배경이 있다. 프로이트는 스트레스 또는 내적  갈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전략을 심리적 방어기재라 칭했다.  현실을 부정하거나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거나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정신승리는 일종의 심리적 방어기재다. 개인의 노력으로 결과를 바꿀 수는 없지만 결과에 대한 해석은 바꿀 수 있고 그럼으로써 평안을 찾을 수 있다면 정신승리가 뭐 나쁠까?  


심리적 방어기재를 잘 보면, 실패를 대하는 태도가 절망과 우울만 있지는 않다. 망각도 있고 회피도 있고, 사회적으로 용인된 방식으로 감정을 분출하는 ‘승화’도 있다. 지금까지 어떤 심리 연구에서도 성공이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고 실패가 불행을 만들지도 않는다. 망가졌다 생각하니 망가진 것이다. 


아마도 가족이 없다면, 주변에 아는 사람이 없다면 실패해도 이리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망가졌다는 생각은 주로 내가 어떻게 보여질 지 걱정하는 데서 나온다. 그래서 아내에게 미안하고 자식에게 미안하다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가족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남이다. 나 때문에 부끄러워도 잠시뿐이고 24시간 ‘나'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자기 인생에 너무 관심없는 건 당신이다. 제발 남 걱정 말고 자기 인생만 바라보자. 그들도 원치 않는다.  


<나의 아저씨>를 보는 내내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드라마 결말은 마음에 들어도 다른 것은 그렇지 않다. 

죽긴 왜 죽어. 그냥 살지. 

나는 늘 그들이 살기를 바랬다.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남들이 해낸다면 나도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혜린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길 바랬고 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도 자살이 아니길 바란다. 


망하는 거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설득하기 위해 구구절절 써봤지만 이래저래 다 모르겠으면 그냥 살면 된다. 그냥 살자. 

누구는 매일이 행복해서 사나? 

살아있으니 사는 것이고 살아지니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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