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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Oct 07. 2024

기억 속에 사는 것이라면

'세상은 지옥이지만 우리는 다른 이의 호흡으로 살아간다.'


구조주의적 발상이다. '나'의 생존마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하고 있다. 이딴 말은 믿지 않겠다. 그러나 혼자의 힘만으로 살아가기는 만만치 않다. 힘겹다. 매일이 기적처럼 반복되는데 이게 정말 내 의지만일까? 나는 무엇으로 살아가는 것일까? 


하루 중 기억 속을 헤집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며 보내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먹고 씻고, 육체적 노동이나 운동, 액티비티를 빼고 나면 나머지는 생각하는 시간으로 볼 수 있다. 잠자는 시간 빼고 16시간을 깨어 있다고 했을 때 그중 몇 시간이나 나는 생각할까? 4시간? 6시간? 


머리를 쓰며 일하거나 글을 쓴다면 그건 생각 속에 사는 시간에 포함시켜야 하나? 그럴 것 같다. 그러면 8시간? 운전할 때조차 절반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 기억에 의존해 사는 시간은 훨씬 더 길 수 있다. 

노닥거릴 친구도 없고 의미없이 모여 술 마시기도 싫어서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보며 시간을 보낸다면 그 시간은  생각 속에 사는 것인가? 딱히 활동하지 않고 두뇌만 활동하니 그렇다. 독서나 게임은 말할 것도 없다. 

잘 따져보라. 우리는 실상 꽤 많은 시간을 생각 속에서 보내고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 마르셀 프루스트는 천식이 심해 미세 먼지와 꽃가루에도 발작을 일으켰다. 게다가 소음에 예민한 신경증까지 가지고 있어 먼지 막이 이중창문에 방음용 코르크로 두른 방에서 지내야 했다. 그는 38세에 이 방대한 작품 집필에 들어갔는데 취재를 위해 잠시 외출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간을 이 밀폐된 방에서 지내며 집필에만 몰두했다. 


녹음기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사방이 꽉 막힌 공간에서 오직 기억에만 의존해 몇 시간이고 글을 쓰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어쩌면 의식의 흐름 기법은 필연적 결과였을 것이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기억의 단편들은 체계적인 순서가 없다. 발생 시간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공간적으로 구분되지도 않는다. 길거리에 피어난 산사나무 꽃을 보고 어릴 때 뛰어놀던 시골 길을 떠올리고 거기서 만났던 첫사랑 꼬마를 생각했다가 훌쩍 커버린 낯선 여인을 우연히 만났던 기억을 끄집어낸다. 그 여인은 내 친구의 여자가 돼 있고 나는 그 친구를 질투하다 보니 우정에 금이 간다.  이런 식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매력은 그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작가의 머릿속을 탐험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나도 언젠가는 해봤을 법한 고민과 의심, 질투, 환희와 기쁨, 슬픔까지 모든 감정이 나열되고 결국 언젠가는 하게 될 고뇌와 절망, 죽음에 대한 공포까지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진정으로 내게 가장 큰 체험은 프루스트다. 이 책이 있는데 과연 무엇을 앞으로 쓸 수 있단 말인가?"


버지니아 울프가 그랬듯이 이 책을 읽고 나면 모든 감정이 소모돼 무기력에 빠지고 삶이 시시해지며 

더이상 소설을 쓴다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프루스트가 기억 속에 살며 재현해 놓은 세계는 그만큼 정교하다. 


소설이라는게 독자가 읽으라고 쓰는 것은 맞지만 제1의 독자는 언제나 작가 자신이다. 때문에 프루스트는 소설을 쓰면서, 쓴 소설을 퇴고하면서 자기가 만든 기억의 세계 속에서 여생을 살았다. 소설을 출판하고 독자가 읽고 좋은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은 나중의 문제다. 프루스트는 그 무엇보다 스스로를 위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것이다.  

*실제 프루스트 생전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체를 읽은 사람이 몇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참고로 프루스트는 1922년에 죽었고 마지막권이 1927년에 출판됐다.   



현실은 지옥이다. 은유가 아니다. 지옥의 본질이 끝나지 않는 고통이라면 사람에 따라 현실을 그렇게 느낄 수 있다. 내가 현실이 지옥이라 생각하는데 누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나? 그래서 현실 도피가 횡횡한다. 게임 속으로 영화나 소설 속으로 그것도 아니면 사실과 거짓이 뒤섞인 가짜 기억 속으로...  

드라마의 재밌는 장면만 돌려보듯 생의 가장 좋았던 때를 떠올리고 편집하며, 편집된 기억을 아름답게 포장해 실제와는 다른 가짜 추억으로 간직한다. 이런 일을 반복하면 과거는 아름답게 탈바꿈하고 기억의 연장선에 있는 미래까지도 화려하게 변신한다. 인간의 기억은 이런 것이다. 행복을 위해 못 할게 없다. 


누군가는 백일몽 또는 망상이라 폄하하고, 꿈 깨라며 호통도 치겠지만 사실 이게 뭐 나쁜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기억을 왜곡하든, 그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든 아무 상관없다. 내가 볼 때는 넷플릭스에 빠지나 독서삼매경에 빠지나 똑 같고, 하루 10시간 롤플레이 게임 속 세계를 헤매는 것이나 칠판 가득한 숫자 속에서 패턴을 찾는 이론물리학자가 다를 게 없다. 모두 기억이나 생각 속에서 살고 있다. 


영국의 물리학자인 로저 펜로즈는 양자중력 이론을 바탕으로 뇌의 뉴런과 신경망에서 기억과 의식의 작용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가설에 따르면 뇌 속에서 양자 중첩 상태가 유지되다가 어떤 결정적 순간에 양자 붕괴가 일어나고, 이 붕괴가 의식적 경험을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머릿속 사건이나 현실의 사건이나 기본 원리는 같다. 둘다 양자역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물리학적 사건이다.  따라서 생각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 실제는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저 다른 공간이나 차원에서 발생하는 사건일 뿐이다. 더구나 현실에 없는 것이 생각 속에 있는 경우도 많다. 천사, 악마, 엘프, 드래곤 같은 상상의 산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미래와 자유다. 


먼저 미래, 현실에는 언제나 현재만 존재한다. 기껏해야 과거가 있었다. 하지만 미래는 기억과 생각으로 구성된다. 기억을 재료로 미래를 만들고 생각 속에 구현한다.  


둘째 자유, 현실은 질서정연하여 숨이 막힌다. 출퇴근 시간이 있고 때가 되면 밥을 먹고 잠을 잔다. 현실 속 인간의 모든 행위는 시간이라는 박자에 맞춰져 있다. 가로세로 빽빽한 도시에 살면서 초록불이 켜지면 진행하고 빨간불이 켜지면 멈춘다. 엘리베이터가 오지 않으면 대통령이라도 멈춘다. 생각 마저 멈추는 것 같다. 

내 인생의 동반자 스마트폰이 수집한 빅데이터에는 내가 어딜 가고 누굴 만나고 뭘 사고 뭘 먹었는지 모든 게 기록된다. 이것도 모자라 수백 만대의 CCTV와 블랙박스가 24시간 우리를 감시한다.  


그러나 자연은 원래 무질서하다. 엔트로피 법칙, 열역학 2법칙은 우주탄생 이후 한결같이 자연을 무질서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둘 중의 하나다. 문명의 발전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고 있거나 혹은 우리가 만든 질서정연함이 실제는 더 무질서하거나. 


내 머릿속은 자연을 닮아 늘 두서없이 혼란하고 불안정하고 아무 생각이나 떠오른다. 그리고 난 그 속에서 살길 원한다. 자유롭고 싶기 때문이다. 좋다, 이제부터라도 생각 속에서 살자. 이미 상당 시간을 생각 속에 살고 있는데 못할 게 뭐냐.


그런데 문제가 있다. 기억 속에 살려 해도 현실은 버릴 수 없다. 현실에 의존하는 이상 생각 보다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숨만 쉬고 사는 것 같은데 뭐 이리 많은 것들이 필요한지 이해되지 않는다. 먹고 사는데 필요한 건 그렇다고 하고 그것 말고도 너무 많은 것들이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문 앞에는 온갖 종류의 택배가 쌓이고 있다. 

게다가 비물질적인 것들도 있다. 이름이 필요하고 명성이 필요하고 관계가 필요하며 신뢰가 필요하다. 살아갈 용기가 필요하고 해내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며 무너지지 않을 신념이 필요하다. 이런 것들이 없으면 현실을 살지 못하고 현실을 못 살면 기억 속에 살 수도 없다. 도대체 나는 무엇으로 사는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인가? 그냥 살기 위해 사는 것일까? 이건 좀 싫은데.


기억을 많이 하면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상대는 다 잊은 것들을 두고 나 혼자 괴롭기 때문이다. -이래서 둔한 사람은 못 이긴다는 말이 나온다. '쟤는 다 잊었어! 그래봐야 너만 손해야!'


언제나 연연하는 쪽은 나다. 더 많이 기억하고 더 오래 기억하기 때문이다. 기억 속에 살다 보니 이만한 손해는 감수하는 법을 배웠다. 익숙해졌다. 

좋은 점은 기억도 살아가는 재료가 된다는 것이다. 기억을 많이 하면 추억할 것이 많고 기억 속 세상이 풍성해진다. 기억을 연료로 살아가는 것이라면 나는 남들 보다 살아갈 것이 많다.  


언제부터인지 관찰 예능이나 리얼 다큐멘터리, 뉴스까지도 기피 대상이 됐다. 아마 뻔한 현실에 대한 거부감때문일 것이다. 현실 속 남의 인생에 관심 가져서 뭐하나? 남의 인생에 관객이 되느니 상상 속에 살아도 내 인생이 낫지 싶다. 다 본 드라마를 다시 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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