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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Aug 20. 2019

내일부터 우리는 남이다

어디까지 ‘나’이며, 어디부터가 ‘남’일까? 너무 쉬운 질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질문을 바꿔 보자. 어디까지 ‘내 일’이며 어디부터가 ‘남의 일’일까?      


맨날 늦잠 자던 인간이 새벽부터 일어나서 귀성 KTX 열차표를 예매한다고 난리치고 있을 때, “그래 그건 니 일이다. 추석 때 너네 집 가려고 하는 짓이니까. 난 남들처럼 명절 연휴에 해외여행 한번 가보는 게 꿈이지만.”

휴가철은 거의 끝났지만 이제라도 가족여행을 추진하겠다며 휴가계획을 짜고 있을 때, “뭐 내가 도울 일 없어? 휴가는 ‘니 일’이자 ‘내 일’이니까.” 

얼마 전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의 학원을 알아 볼 때, “당신은 가만히 있어. 괜히 망치지 말고.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아이 교육은 무조건 내 일이다. 선을 긋는다. “이 선 넘지마. 무관심이 어려우면 알바 해서 돈이나 더 가져와.”     


‘니 일’과 ‘내 일’이 이익에 따라 결정되는 것 같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심리적으로 ‘나’에 대한 정의와 범위가 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아이는 ‘나’의 범위 안에 들어간다. 남편에게 시댁은 가족의 범위에 들어가지만, 처가는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의 일은 곧 엄마의 일이 되지만, 남편에게 장인의 생일은 남의 일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심리적 선은 ‘나’와 ‘남’에 대해 제법 유동적인 구분을 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유사성 이론을 잠시 꺼내 보자. 아이와 아빠는 넓은 이마가 비슷하게 생겼고, 아이의 갸름한 코는 제 누나를 닮았다. 하지만 엄마와는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다. 그럼 이 아이의 엄마는 따로 있는가? 아니다. 빠트린 게 있다. 아이의 누나는 엄마와 똑같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는 겉보기에 엄마의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누나를 거쳐 공통된 요소를 보유하게 된다. 


다시 말해, 위의 4인 가족을 하나의 가족이라 정의할 수 있는 한 가지 공통요소는 없지만 그물망처럼 가족 전체를 아우르는 ‘유사성’이 있다. 그것이 가족유사성이다. 


‘나’와 ‘남’의 정의도 비슷하다. 현실적으로 완벽하게 구분돼 있는 것처럼 보여도 얼마나 많은 공통사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나’의 범위는 확장된다. 부모가 포함될 수 있고 자식이 포함될 수 있다. 형제가 포함될 수 있고, 연인이나 친구도 포함될 수 있다. 즉 그들의 일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부부 사이는 어떠한가? 부인과 남편은 서로 ‘나’의 범위에 들어가는가? 다른 건 몰라도 순서상 자식은 남편이나 부인 없이 존재할 수 없었음에도 자식은 ‘나’의 범위에 들어가도 배우자는 ‘나’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을 때가 많다. 


왜 그런 지에 대해서는 하늘의 별만큼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부부가 깨지는 순간 ‘나’의 범위는 총체적으로 흔들리고 재정의된다. 이제까지 확실한 ‘나’였던 대부분의 관계가 큰 시련을 겪는다.  

왜냐하면 사회가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사회의 가장 하부구조는 결혼이라는 형태로 시작됐고,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족도 결혼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부부 없이는 가족도 가족유사성도 존재할 수 없다. 


우리 모두 결혼해서 가족을 만들자는 말이 아니다. 남편과 부인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더욱 아니다. 인간의 의식구조가 참으로 이상해서 잘 따져보지 않으면 중요한 건 놓치고 엉뚱한 것에 집착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아무리 봐도 그건 니 일 아닌데 ‘니 일’처럼 하는 너, 아무리 봐도 그건 자기 일 맞는데 ‘남 일’처럼 대하는 너, 그 모든 이유가 ‘나’와 ‘남’에 대한 범위를 착각하고 있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림 출처: 마르크 샤갈 作  <도시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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