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하게 살아남기 2

낙천적 세계관의 도입

by 시sy

인간의 몹쓸 버릇 중 하나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을 습관처럼 인사로 건네는 것이다.


"잘 잤어?"


당연히 잘 잤을 거라는 믿음으로 하는 말이지만 잘 자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수면 중에는 부정적인 감정에 관여하는 편도체가 과도하게 활성화돼 좋은 꿈보다는 나쁜 꿈을 꿀 확률이 높다. 게다가 잘 자기 위해서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한다. 신체만 건강하기도 힘든데 정신까지 건강하라니..

그런 면에서 몹쓸 인사가 하나 더 있다.


"잘 지냈어? 별일 없지?"


달리 대답하기 귀찮아서 '잘 지낸다'라고 답하지만 잘 지내기가 그리 쉽나? 설사 반만 잘 지냈어도 인간의 뇌는 생존 본능 때문에 걱정이나 불안 같은 못 지낸 기억을 더 잘 보존한다. 그래야 학습을 통해 유사한 불상사를 피할 수 있다.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잘 떠오르고 오래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 잘 지내, 이 간단한 질문에도 나는 솔직하게 답하기가 참 어렵다. 그래서 보통 이렇게 답한다.


"뭐, 그냥 있어."


수면 중에는 이성적 사고와 감정 조절을 담당하는 전전두엽의 활동이 억제되는데 이 때문에 비논리적이거나 극단적인 시나리오가 꿈으로 재현된다. 특히나 감정적으로 민감한 사람은 꿈에서 더 강한 감정을 느끼고 부정적인 방향으로 발전시킬 확률이 높다. 바로 나처럼.


잘 자기가 이렇게 어려운데 어젯밤에는 그 어려운 걸 내가 해냈다. 꿈도 좋은 꿈이었다. 심지어 오전에는 무지개도 봤다. 이런 날에는 응당 좋은 일이 생겨야 하는 것 아닐까?


아니다. 좋은 꿈과 무지개는 내 일진과 아무 상관없었다. 어떤 면에서 정반대였다.


주말이어서 늦잠을 자고 점심 무렵에 차에 뭘 가지러 갔는데 조수석 후미등이 박살 나 있었다. 진짜 어이없는 건 그다음이었다. 앞유리 와이퍼 밑에 메모지가 있어서 봤더니, '연락처가 없어서 전화번호를 남긴다'는 손글씨가 적혀 있었다. 그래도 양심은 있었나? 하는 착각도 잠시, 전화를 걸었더니 '없는 번호'라는 ARS 안내가 흘러나왔다. 뺑소니가 아니라는 핑계를 남기기 위해 거짓 번호를 적은 것이다. 알고 보니 나중에 잡혀도 전화번호 실수였다고 발뺌할 목적으로 그런다고 한다. 차라리 그냥 도망가지. 수법이 지능적인 데다 사악하기까지 하다. 얼마나 자주 이런 일을 벌이고 다니면 치밀한 뺑소니 준비가 돼 있을까?


여기서 문제! 나는 어느 정도 분노해야 적당할까?

물론 뒤늦게 자문하는 것이지, 그 순간에는 몹시 짜증 났다. 물피 사고를 내고 도망친 것도 치사한데 가짜 번호까지 남기고 가다니.. 그 나쁜 놈에게 이중으로 당한 생각을 하면 화가 치밀었다. 게다가 자차 보험으로 처리해도 적지 않은 금액을 지불해야 하며 차량 수리에 드는 여러 수고를 감당할 생각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요즘은 서비스센터 예약도 잘 안되는데. 차 맡기면 출퇴근 힘든데. 도대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점점 증가하는 분노게이지는 놔두면 끝도 없이 치솟아서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때 불현듯 든 생각,

'화 내면 나만 손해 아닐까?'


기본적으로 화내는 것은 일상에 아무 쓸모없다. 화는 스트레스 반응이기 때문에 편도체가 과활성화되고 이성과 계획을 담당하는 다른 뇌의 영역을 억제한다. 즉 집중과 의사결정, 단기 기억을 담당하는 전두엽 기능이 저하되기 때문에 화가 치솟으면 당장 해야 할 일을 망각하고 곧잘 실수를 한다. 비유하자면, 화내는 동안에는 인간의 뇌가 수면 상태와 유사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꿈속에서 하는 여러 미친 짓을 하기 쉽다.


화내서 유일하게 좋은 것은 분풀이다. 폭풍 같은 감정 쏟아내기를 하고 나면 약간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화냄의 대상이 굴복할 때 이야기다. 굴복하지 않거나 자칫 엉뚱한 데 화풀이를 하면 카타르시스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크기의 후폭풍을 감당해야 한다. 예를 들어 화난다고 집에서 뭔가 집어던져 깨뜨리면 깨지는 순간 희열을 맞 볼 수 있겠지만 곧 아내(?)에게 손이 발이 되게 빌어야 한다. 몇 날 며칠을..


물피 도주와 같이 화낼 대상도 없는 경우에는 더 황망하다. 어디에다 화낼 것이며 대상이 없기에 그 어떤 카타르시스도 기대할 수 없다. 가족 앞에서 씩씩대는 모습을 보이는 게 전부다.

어떻게 할 것인가? 아내 앞에서 불 같이 화내며 남자 다움을 보인다고 해서 어떤 존경도 기대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이 정도는 괜찮아. 보험 처리하지 뭐.' 하고 쿨하게 넘어간다면 멋져 보일까?


"블랙박스, CCTV 확보하고 경찰서에 신고해! 등신 같이 당하지만 말고. 아무리 귀찮아도 이런 X는 꼭 잡아서 정의 실현을 해야 해!"


이렇게 나온다면? 분노의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는 게 오히려 손해 아닐까?


CCTV는 사각지대고 내 블랙박스에는 안 찍혔고, 이 정도 일로 다른 차량 블랙박스를 요구할 수도 없으니 경찰에 신고한다 해도 도주범을 잡을 가능성은 없었다. 게다가 경찰서에 가서 조서 쓰는 일은 얼마나 번거롭나? 무엇보다 나의 수고와 감정 소모는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한다.


이래저래 손익 계산을 해보니 화를 꾹 참고 감정 소모에 시간 낭비 않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판단됐다.


'그래 잘 생각했어! 차 사고가 크게 난 것도 아니고, 누가 다친 것도 아니고, 길 가다가 미친놈에게 폭행당하는 일도 벌어지는 세상인데 이 정도 손해는 살면서 감당해야 할 매몰 비용이라 생각하자.'


이리 생각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은 것도 잠시, 곧 다른 생각이 치고 들어왔다. 이런 식이면 모든 불편한 경험을 더 큰 불행에 견줘 무마시키는 게 가능하다는 것인데 할 수만 있다면 평생 어떤 화도 안 내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이 도출됐다. 차라리 이참에 분노 감정을 삭제하면 어떨까?

그런데 분노만 실익이 없나? 다른 격한 감정도 마찬가지다. 너무 슬퍼도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고 너무 기뻐도 이상한 행동을 하긴 마찬가지다. 기쁨은 마약과 같으니..


여러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생의 슬픔과 기쁨을 골고루 경험하고 이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으라고 충고한다. 그런 의미에서 분노 없는 삶은 너무 밋밋하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어느 정도의 분노가 적당한가?


오늘 출근을 하며 파손된 내 차를 보니 짜증이 좀 올라오긴 했지만 어제와 같지는 않았다. 하루 만에 분노 감정이 대폭 줄어든 것이다. 어차피 이리 차분해질 것을.. 어제 그리 큰 화를 내지 않았던 것이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어제 오후 내내 찜찜하고 우울했던 것이 너무 손해라고 생각했다.


완전히 화내지 않고 사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옳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적정한 수준에서 잠시만 화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무심코 <닥터 후>를 보다가 깨달음이 왔다.


닥터 후는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오갈 수 있는 종족이다 보니 모든 감정이 일시적이고 즉흥적이었다. 미래를 알 수 있고 과거를 고칠 수도 있으니 심각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감정에 진지함이 없었다. 감정은 감정일 뿐 판단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타임머신이 없다. 미래를 모르고 과거도 못 고친다. 그럼 어떡해야 할까?


영화의 결말이 해피엔딩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아무리 극적인 장면이 나와도 긴장되지 않는다는 것에 착안했다. 내 인생이 해피엔딩이라면, 이 모든 고통은 과정에 불과하다. 고난과 불편은 극적인 요소를 가미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그러니 지나치게 심각하지 말자. 감정은 일시적인 게 맞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내 인생이 해피엔딩이라는 보장이 없다. 솔직히 그건 누구도 모른다. 그래서 해피엔딩일 것이라 믿기로 했다. 바로 낙천적 세계관의 도입이다. '다 잘될 거야.'에 만족하지 않고 '더 잘될 거야.'라고 생각하기.


행복이 자기만족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다만 구질구질하게 살면서 혼자만 만족하면 바보가 되는 것 같아 그러기 싫을 뿐이다. 그래서 불평하고 투덜거린다. 나는 지식인이고 마땅히 우울하며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지향한다고. 그렇게 수십 년을 살았다.


하지만 결심했다. 최소한 2025년은, 1년이 안 되면 한 달이라도 낙천적 세계관 속에 살아 보겠다고.

낙천적 세계관 도입을 위해서는 조금 바보 행세를 하는 수밖에 없다. 또한 가족이나 주변 사람에게 '너는 어쩜 그리 태평하니?'라는 비아냥을 들을 수 있다. 다 상관없다. 어차피 타인은 나에게 관심 없다. 창피해도 나 혼자 창피하고 자랑스러워도 내 착각일 뿐이다.


여전히 못 하겠으면 이렇게 생각하자. 디오니소스적 세계관을 따르겠노라고. 훨씬 있어 보인다.

"내게 고통과 불확실성이 가득한 삶 자체는 축제와 같다. 매일이 축제이고 파티다! 내 안의 억압된 열정과 쾌락을 해방시키자. 그리하여 자유로와 지자."


자유롭게 다시 태어나겠다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삶을 피할 수 없으니 즐기자.

나 혼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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