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주의는 적이란 것을 알지 못하며 하인을 원하지 않는다.
이 정선된 영역에 속하고 싶지 않은 자는 그냥 바깥에 있어도 좋다.
아무도 그를 강요하지 않는다."
- 슈테판 츠바이크 [에라스무스 평전]
들어오지 않아도 좋으니 그냥 바깥에 서 있으라. 강요하지 않는다.
이 문장이 좋았다. 강요하지 않으니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뿐이다.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인문주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인간과 세계를 성찰하고, 천재들이 남긴 유산을 향유했으며, '꿀벌처럼 모은 지식'을 바탕으로 글을 썼다.
그러나 길을 잃었다. 갈 곳을 찾지 못한다.
미디어 간 경쟁을 분석하는 적소이론이라는 게 있다.
원래 적소이론은 생태계 내에서 개체군 간의 경쟁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인데, 쉽게 말하면 같은 서식지를 가진 다른 종들이 경쟁하면서 이긴 종은 정착하고 진 종은 쫓겨나거나 도태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네이버 포털이나 페이스북 같은 디지털미디어가 등장하면서 신문, TV뉴스 같은 기존 미디어가 뉴스 시장에서 밀려났다. 따지고 보면 이론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간단한 논리다. 승자승! 이를 찬미하는 노래도 있다.
'the winner takes it all, the loser standing small.'
ABBA, 멜로디만 들으면 아름다운 노래이지만 듣다 보면 참으로 야속하다. 이긴 사람이 다 갖고, 진 사람은 그냥 찌그러지라니.. 어떻게 그래? 꼭 이긴 사람이 다 가져야 할까? -이 노래는 사랑의 노래니 사랑을 나눌 수 없는 것 이해한다.
요즘 나는 적소이론에서 서식처를 잃은 느낌이다. 디지털 시대라 플랫폼은 다양해도 독자들의 취향은 그다지 다양하지 않은 것 같다. 내 글을 좋아할 독자를 찾아 여기저기 기웃대도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겠다.
마음의 소리가 말한다.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글을 써! 네가 변해야지. 독자가 어떻게 변해? 독자도 소비자야. 판매자인 네가 소비자 취향에 맞추는 건 당연하잖아."
지극히 맞는 말이다. 안 해 본 게 아니다. 그런데 매번 실패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가 먼저 말했다시피, '나는 어쩔 수 없이 나다. 내가 나인 것을 설명할 필요도 증명할 수도 없다.'
나는 나의 세계에 대해 글을 쓰고 내 생각을 쓸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어떤 시도를 해도 결국 '나'라는 지평을 뛰어넘을 수 없다. 나의 세계는 곧 나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지는 것을 반복하고 패배에 익숙해지며 작아진 마음으로 새로운 서식처를 찾아 떠난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새로운 종류의 디지털 유목민이 되었다.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 같다.
절망하지 않고 글을 쓰는 것도 지치는 일이다. 운동보다 힘들고, 미워하는 인간을 매일 미워하는 것보다 더 힘이 든다. 힘을 빼려 하니 욕심을 내려놓아야 하고, 욕심을 내려놓고 나면 글 쓰는 버릇만 남는다.
삶의 고통을 외면하면 편해질 수 있지만 결코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다는 진실을 마주한다. 그리하여 분노한다.
"이제 통증은 없었고 통증과 함께 공포심도 사라졌으며, 이제 느끼는 것은 극심한 피로감과 이것이 끝이라는데 대한 분노가 전부였다." <킬리만자로의 눈>, 헤밍웨이
다시 일어나 글을 쓰고, 서식지를 찾다 보면 마침내 내가 도달할 곳은 눈 덮인 산꼭대기의 조그만 평지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굴복하고 나니 이해하는 것이다.
"서쪽 정상 부근에는 말라 얼어붙은 표범의 시체 한 구가 있다. 표범이 그 고도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던 것인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다." <킬리만자로의 눈>, 헤밍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