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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Aug 25. 2019

코스트코 정글에서 살아남기

어제, 토요일, 코스트코를 가기로 다짐한 나의 각오는 비장했다. 목적지는 평상시 차 많고 주차 힘들기로 악명이 높은 양재 코스트코, 먼저 출발 시간을 정하기 위해 면밀하게 내비게이션으로 교통상황을 살폈다. 25분 각, 내비는 주차시간을 고려하지 않으니까 주차까지 40분을 잡았다. 오는 길은 수월하니 20분, 쇼핑에 한 시간, 도합 2시간. 그리고 스스로 물었다.

각오는 돼 있는가? 나의 의지는 얼마나 굳은가? 천금 같은 토요일, 길바닥에서 가지 않는 앞차의 꽁무니를 바라보며 하루를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출발, 교통상황은 순조로웠다. 다음은 주차, 원래대로 라면 코스트코 건물 반 바퀴는 돌아 주차 대기선에 차를 세워야 했겠지만, 이게 웬일? 단숨에 건물입구까지 진입했다. 난 긴장을 풀지 않았다. 

주차장 3층에서 더 올라가기를 멈추고 매의 눈으로 곧 나갈 차가 있나 살폈다. 트렁크가 열렸거나 전조등이 켜진 승용차가 제1타겟. 4층 5층으로 올라가면 주차공간이 있을 가능성이 더 높지만 쇼핑이 끝나고 무거운 카트를 밀며 올라갈 생각을 하면 여기서 머물며 기회를 잡는 게 현명한 판단이다. 


나의 판단은 옳았다. '반드시 3층에 주차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사표시로 안전등을 켜고 3층을 서서히 돌고 있는데 은색 승합차량의 전조등이 깜박거렸다. 차주인이 리모컨으로 도어락을 해제하는 신호. 지척거리에 차를 정차하고 참을 성 있게 차가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순조롭게 주차까지 마치고 현재 시간 체크, 출발 후 35분이 지났다. 1차 목표 달성이다. 다음 관건은 정확하게 사려고 목표했던 물건만 사서 쇼핑을 끝낼 수 있느냐, 난이도 9이상의 상당히 어려운 과제다.


먼저 가성비 갑의 생수를 카트에 쌓았다. 공복에 야채를 먼저 먹어 배를 채우고 다른 음식을 덜 먹어 보겠다는 얄팍한 전술처럼, 덩치 큰 생수 박스로 카트를 채우는 것이다. 카트의 무게감이 신체에 피로감을 주고 쇼핑 시간을 단축해주는 효과가 있다. 

그다음은 쌀, 역시 생수와 비슷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과일코너로 접근, 언제나처럼 고민에 휩싸인다. 코스트코 과일은 가격에 비해 신선하기로 유명하니, 품질은 걱정 없지만 문제는 상하기 전에 다 먹을 수 있느냐이다. 냉장고의 과일 재고와 집에 체류하는 시간, 과일의 평균 소비속도까지 꼼꼼하게 따져본다. 결론은 수박은 포기하고 블루베리를 산다. 


잘하고 있어, 합리적 소비자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는 자부심에 뿌듯할 무렵 냉장고에 달걀이 떨어졌다는 생각이 났다. '60개에 7500원, 대박 싸다!' 내 손은 인형뽑기 기계의 로봇팔처럼 가차없이 달걀 꾸러미를 집어 들었다. 그때 전두엽에 에러 메시지가 포착됐다.

당신은 유통기한 내에 달걀 60개를 소비할 능력이 없습니다.

전에도 생각없이 달걀 60개를 샀다가 계란이 병아리로 부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남은 달걀을 전부 삶고 식사대용으로 먹어 보려다 포기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달걀 원위치 ㅠㅠ


잠시 헐거워진 정신줄을 놓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카트를 밀었다. 아, 최대위기가 닥쳤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이다. 

크루아상 천원 추가 할인

크루아상, 마들렌, 슈크림콤보 이른바 코스트코 3대 빵의 유혹은 실로 대단해서 나 같은 빵 매니아들은 이것 때문에 주기적으로 코스트코와 이별한다. 사랑해서 이별한다는 말이 정말 그럴듯한 순간이다. 


기적 같은 의지를 보이며 빵들의 유혹을 외면하고 계산대에 도착, 대충 살 것만 산 것 같은데도 15만원은 가볍게 넘었다. 순서를 기다리며 늘어선 카트의 벽 너머로 사람들이 또 다른 줄을 선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즉석에서 구워주는 피자와 불고기베이크, 핫도그, 치킨 샐러드가 유튜브의 프리롤 광고처럼 내게 손짓한다. 집에 가는 차안에서 즐거워지라고. 인생 뭐 있냐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철학적 고뇌에 빠졌다.

나는 오늘 적절한 양의 물품과 식료품을 구입했는가? 나의 구매가 정당했음을 증명하기 위해 과소비를 하거나, 남은 식품을 입에 쳐 넣고 운동량을 두 배로 늘리면서 세상을 저주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또 한번의 허탈감 속에서 귀가를 서두르는 동안, 내 기억이 놓치고 있었던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주차 줄이 길어지기 전에 진입을 서두르다가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고 나서 횡단보도를 지나쳤던 것, 더욱이 그 위에는 교통 카메라가 있었다. 

왜 이제야 그 사실이 떠올랐지? 신호위반은 최소 4만원, 이래서야 코스트코까지 와서 합리적 소비를 한답시고 부산을 떨었던 것이 모두 헛짓 아닌가? 

소스라치게 놀란 가슴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이제 남은 저녁시간은 깊은 반성과 자괴감 속에 끝날 것이다. 게다가 나의 소심함이 주말까지 엉망진창으로 만들 것이라는 생각은 침묵의 나선을 그리고 있었다.     


미드 <모던 패밀리> 시즌1을 보면 아빠부부인 캠과 미첼이 입양한 아이의 기저귀를 사러 코스트코를 가는 장면이 나온다. 미첼은 기저귀 하나 사러 코스트코까지 가는 캠을 질책하지만 코스트코에 도착한 뒤 천장까지 쌓여있는 다양한 상품들을 보고 엄청나게 환호한다. 캠이 잠시 눈을 판 사이에 미첼은 여기저기서 각종 물건을 들고 와 카트에 쌓아올리고, 카트 하나로도 부족해 여러 개의 카트를 밀고 다니며 아예 용달차를 부르자고 한다. 

캠, 여긴 천국이야. 없는 게 없어. 게다가 서류 세단기가 겨우 ** 밖에 안 해!

코스트코에 처음 간 사람이 일반적으로 겪게 되는 문화충격이며 과구매-과소비 코스의 첫걸음이다. 그나마 미국의 코스트코는 주차장이 널찍하고 사람도 많지 않아 쇼핑하는 동안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곳이나 사람이 많은 우리나라는 다르다. 코스트코 안에서도 카트 정체 속에 서로 먼저 지나가기 위해 끼어들기를 하고, 곳곳에 세워놓은 카트들은 꼭 불법 주정차한 자동차를 보는 것 같다. 

사람에 치이고 시간이 촉박하다보니 합리적 구매를 할 여유는 없어지고 ‘저건 사야해!’라는 충동에 속속 무릎 꿇기 마련이다.


나도 패자인 주제에 코스트코에서 합리적 소비 운운하고 싶지 않다. 다만, 그 정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자기만의 노하우 한두 개 정도는 갖추길 권장하고 싶다. 


사진출처: 블로그 '체리의 코스메홀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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