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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Aug 28. 2019

권태가 스트레스를 부른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권태를 느꼈다. 매일 똑같은 일상, 반복되는 출퇴근, 후텁지근한 날씨까지. 이대로 이렇게 계속 되는 것일까? 지옥은 무한 반복이라고 하던데, 이미 지옥에 들어선 것일까? 내 죄는 뭐지? 지겨운 죄?

말도 안 되는 망상이 꼬리를 물었지만, 출근길에 올랐다.

      

12년 전 이맘때쯤 미국의 억만장자 스티브 포셋이 네바다주에 있는 개인비행장에서 단발엔진 비행기를 몰고 이륙했다. 스탠포드 대학 출신으로 증권업계에서 일하다가 마라톤증권을 창업해 엄청난 돈을 벌었던 포셋은 인생 후반전을 극한의 모험을 즐기며 살았다. 그는 세계 최장인 76시간 연속비행 기록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빠른 차 운전기록에 도전하기 위한 제트엔진 장착 자동차도 보유하고 있었다. 

포셋이 보유하고 있던 제트엔진 장착 자동차

이날 비행 목적도 제트엔진 자동차를 시험 운행하기 위한 장소를 찾으려던 것이라고 알려졌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포셋은 이날 죽었기 때문이다. 사고원인은 미상, 실종 1년 후 포셋의 면허증과 짐승에게 뜯긴 뼛조각이 사막에서 발견됐을 뿐이다.      


돈과 명예라는 목적을 달성한 부자들이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취미생활에 집착하는 경우는 종종 볼 수 있다. 

‘인디애나 존스’ 해리슨 포드는 2015년, 73세의 나이에 경비행기를 직접 운전하다가 추락해 중상을 입은 적 있고, F1 황제 미하엘 슈마허는 시속 300km F1 경주로도 모자라 2013년 고속 스키를 타다 사고로 머리를 다쳐 아직도 의식불명 상태다.      


여행사들은 위험한 걸 즐기는 부자들의 습성을 파악해 초호화판 패키지여행을 내놓기도 한다. 전용기를 타고 남극의 가장 높은 산에 도착해 낙하산 점프를 즐기는 여행상품은 약 10억원, 몽골에서 유목민을 동반해 몽고의 황제 쿠빌라이 칸의 독수리 사냥 모험을 간접 체험하는 코스는 20억 원이 넘는다. 

일반적으로 여행이 위험할수록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니 돈이 많을수록 더 큰 자극을 필요로 한다는 공식이 세워질 만도 하다.      


로마시대 귀족들은 원형 경기장에 검투사들을 고용해 서로 목숨을 건 싸움을 시켰는데 권태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리만족 심리라는 분석이 있다. 피와 살점이 튀는 극한의 상황을 간접 체험하면서 긴장하고, 그 긴장이 완화되는 흥분을 느끼는 것이다.      


스트레스란, 정신적 압박감으로 느끼는 고통을 뜻한다. 고통은 나쁜 것이니 스트레스도 없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적절한 스트레스는 집중력과 업무효율을 높여주고 창의성을 일깨우기도 한다. 데드라인이 다가올 때 여태 안 써지던 기사가 술술 써지거나, 퇴근시간이 가까이 오면 보고서 작성 속도가 올라가는 것이 건성으로 대충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고통 역시 나쁜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다. 드라마 <의사요한>을 보면, 선천성 무통각증(CIPA)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 지성은 본인이 CIPA 환자면서 통증의학센터를 담당하고 있는 의학교수로 나오는데, 고통이 없는 그의 삶은 고통이 있는 다른 사람 보다 백배는 더 고단하다. 고통으로 신체 이상을 자각할 수 없기 때문에 매일 바이탈을 체크하고 조그맣더라도 다친 데는 없는지, 이상병증은 없는지 꼼꼼히 살핀다. 그러지 않으면 작은 상처가 곪아 크게 되거나, 감기 같은 별거 아닌 질병으로도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도 비슷하다. 스트레스가 아예 없으면 인간의 정신은 나태해지고 뭘 할지 모르는 상태, 즉 길을 잃기 쉬운 상태가 된다. 때문에, 오묘한 인간의 본성은 적절한 심리적 균형을 찾기 위해 권태로운 마음에 스트레스를 가져다준다. 암벽등반이나 산악자전거 같은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고, 두뇌를 자극하는 게임을 하거나 치열한 이종격투기를 보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모두 스트레스를 푸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를 부르는 행위들인데, 아무리 해도 적당한 스트레스 꺼리를 찾지 못하면 지나친 권태로 인해 약물에 빠지거나 극단적인 행동으로 큰 사고를 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럼 권태가 나쁜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 나쁘지만은 않다. 권태롭다는 것은 지겹다는 것이고 지겹다는 것은 별일 없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별일 없기가 쉬운가? 여차하면 짤리고, 사기당하고, 비난받고, 고소당하는 세상인데.      


나는 지겹고 권태로운 일상을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러나 그 모든 노력에도 다시 스트레스를 부르고 있다. 부딪히고 깨지고 상처받고 원망하는 삶, 고작 이따위 것을 반복하려고 사는 게 아닌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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