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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Sep 06. 2019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권리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간밤에 내린 비로 교통이 막혀 출근을 늦게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침부터 컨디션이 안 좋아서 머리가 맑지 않아서도 아니다. 이유를 설명하고 싶지 않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유를 따져보고 싶지도 않다.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살펴보니 행복추구권, 자유권, 평등권부터 세세하게는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와 1인 시위를 할 권리까지 다 있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권리’는 없다. 뭐든 하는 건 권리가 필요하지만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권리가 필요 없다는 뜻일까?


유사하게나마 적용할 수 있는 권리는 자유권,

개인이 그 자유로운 영역에 관하여 국가권력의 간섭 또는 침해를 받지 아니할 권리.

오케이, 이걸 사용해보자.

“부장님, 오늘 전 헌법상 권리인 자유권, 그 중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권리’를 행사하겠습니다.”

“뭐 아무 것도 안 해? 그럼 월급도 받지 말고 그냥 집에 가!”

“아니, 그게 아니고 휴가 내겠다는 뜻입니다.”     


어거지로 들이댄 권리이다 보니 비상금 같은 휴가를 까먹기는 했지만 최소한 회사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권리는 충족됐다. 그 다음 허들은 집에 있다. 

질문1, 당신은 결혼했습니까? / 아니오.

질문2, 집에 혼자 삽니까? / 예.

퍼펙트, 오늘 하루 당신의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권리는 충족됐습니다. 즐기셈.    

 

만약 위의 질문 두 개를 통과하지 못했다면 회사에서 얻어낸 권리가 집에서 무시될 가능성이 크다. 집안일을 하거나, 아이와 놀아주거나, 부모님과 병원을 가거나, 그것도 아니면 분리수거, 최소한 쓰레기봉투 정도는 갖다 버려야 두 시간 정도 늘어져서 아무 것도 안할 수 있다.     

 

좋다. 드디어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다. 

그런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가능한가? 

꼼짝 안하고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럼 아무 생각도 안 할 수 있나?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겠다’는 생각조차 안하고 머릿속을 텅 비울 수 있나?


불교에서 선방(禪房)의 수도승들이 던지는 ‘화두’라는 게 있다. 한 가지만 줄 곳 생각하라는 뜻에서 고참 스님이 던져주는 ‘문제의식’ 같은 것인데, 실제 화두의 효용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에 있다. 


무념무상이야 말로 수도를 하는 스님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경지인데, 차분하게 있으면 있을수록 온갖 잡생각이 들기 때문에 그에 도달하기는 상당히 어러렵다한다.


그래서 아무 생각 안 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차라리 하나만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화두’다. 

“왜 아무 생각을 안 해야 하는데요?”

“마음은 혼탁한 물과 같다. 혼탁한 물에서는 달을 볼 수 없지만 흙먼지를 가라앉히면 물 위에 뜬 달을 볼 수 있느니라.”

“생각을 다 가라앉히라는 뜻? 좋아요. 그래서 다 가라앉혀서 달을 보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이놈아 그게 쉬운 줄 아느냐?”

“스님, 달을 봤다 치구요. 그럼 다 끝이에요? 깨달은 거에요?”

“아니다. 다시 그 물을 흐트려서 혼탁하게 해야 하느니라.”

“네? 그럼 그걸 계속 반복하라구요? 그럼 어떻게 되는데요?”

“계속 하다보면 하늘에 뜬 진짜 달을 볼 수 있을 게다.”

“헐.”


종종 고참스님들은 이상한 말이나 행위를 함으로써 제자들에게 화두를 던졌다. 그 말이나 행위에 담긴 참뜻이 뭔지 알아내라는 것이다. 


이를 테면 중국의 임제선사는 제자들이 뭘 물어보든 ‘할’이라고 고함을 쳐댔고, 덕산 선사는 마구잡이로 방망이질을 했다. 고승들의 기괴한 행동을 보면서 수도승들은 그게 뭘 의미하는지 고민했고 그것을 자신만의 화두로 삼았다.


원래 화두란 ‘말이 나오기 이전의 근본’을 뜻하는 것으로 꼭 그것이 말(話)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불가의 ‘깨달음’이란 것이 삼라만상의 원리를 깨치는 것인데 그것이 꼭 말로 해야 할 이유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인간 언어의 무용성을 지적한 것으로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고대에 이미 언어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라 생각하니 놀랍기도 하다.  


이런 말 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니 두서없는 생각이 쏟아져 나온다. 


아무 것도 안 하고, 아무 생각도 안 하는 노하우 중 하나는 자신의 호흡을 생각하는 것이다. 자세를 똑바로, 허리를 펴고 앉아서 눈을 지그시 감는다. 꽉 감으면 꽉 감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아무 것도 안 하기 힘들다.


그 다음 코와 입으로 서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나의 호흡이 어느 경로를 따라 어느 곳에 도달하는지 추적한다. 

추적에 열중하다보면 어느새 숨이 사라져 내쉬었는지 안 내쉬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 숨을 쉬면서 내 호흡이 어디로 사라지는지 추적하라. 그러다보면 숨을 마시고 내쉬는 작업이 의식에서 사라지고 어느새 자동 숨쉬는 기계가 된 자신을 발견한다. 


입도 꽉 다물지 않는다. 그러면 입으로 공기가 통하지 않아 자연스럽지 않다. 계속 호흡과 숨만 생각한다. 다른 어떤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몸을 움직이지 않다보면 왠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고, 조금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런 상태가 숨쉬기조차 귀찮은 초절정 귀차니즘과 유사할 수 있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목적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니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궁금하면 실눈을 뜨고 시간을 체크해 봐도 좋다. 기껏해야 5분 정도 지났을 테니. 

“스님, 선(禪)은 왜 하는데요?”

“마음을 비우려는 것이다.”

“그럼 불경 공부한 것도 다 잊고 비워요?”

“당연하지. 싹 다 비워야지.”

“어차피 비울 거 왜 공부해요?”

“이놈아, 비울 게 있어야 비우지.”     


어릴 적 뵈었던 큰 스님은 말발이 대단했다. 묻는 말에는 언제나 청산유수로 답했고, 답할 게 떨어지면 절을 하라고 했다. 답은 자기가 못하고서 절은 왜 내가 해야 하는지. 

“스님, 깨달아서 뭐하는데요?”

“가서 절이나 더 하거라.”     


산중 암자에 살면서 아침은 꼭 토스트를 해먹었다. 이제와 고백하지만 스님이 만들어 준 토스트는 꽤 맛있었다. 

“스님이 이런 거 먹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왜 중은 빵도 먹으면 안 되느냐?”

“빵 맛있잖아요.”

“절하러 가려무나.”     


무념무상(無念無想), 무위(無爲)라고 하면서 스님은 참 바빴던 것으로 기억한다. 새벽에 일어나서 선(禪)을 하고, 토스트를 만들어 먹고, 산책을 하고, 점심거리를 장만하고, 찾아온 손님 만나고, 글 쓰고, 전화하고. 

1년 내내 산중에 살지만, 속세와 연을 완전히 끊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도가(道家)에서는 무위(無爲)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사람간의 관계가 최소화된 ‘소국과민(小國寡民)’의 이상세계를 제안했다. 얼마나 관계가 적은가 하면 ‘이웃 나라와 서로 마주하고 있어 닭,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은 늙어 죽도록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자는 좀 더 극단적이었는데, 국가·정치·권력을 모두 폐기하고 인간의 사회적 생활과 교류가 소멸돼야만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노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설명했다. 


말이야 맞는 말이다. 사회적 관계가 많을수록 바쁘고 자유시간이 적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권리는 위축된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권리를 위해 장자의 말처럼 사회적 관계를 버린다는 건 요즘 세상에 그냥 숨쉬지 말고 죽으라는 얘기와 같다. 


그래서 소극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계획을 세웠다. 

1단계: 스마트폰을 끈다. 완전히 끄기가 아쉬우면 비행기모드로 바꾼다. 디지털세상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스마트폰만 꺼도 할 일이 절반은 줄어드는 것 같다. 


2단계: 노트북, PC, TV 등 일체의 동영상을 보지 않는다. 720P 화질의 동영상을 본다고 할 때 1초당 두뇌가 받아들이는 데이터량은 2700K 비트를 넘는다. 몸은 편히 누었다고 해도 두뇌는 활발히 샘플링을 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안하려면 동영상도 끊어야 한다.


3단계: 지루해 미칠 때까지 집 안팎을 어슬렁거린다. 랜덤으로 선곡돼 나오는 스트리밍 뮤직을 듣는 것은 허용. 대신 지루해 미칠 지경이 되면 독서를 한다. 

꽤 오랜만에 종이 책을 잡겠지만 책 읽는 법을 까먹었을 것이라는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자전거 타는 것과 마찬가지로 몸이 기억하고 있다. 다만, 책 읽다가 5페이지만에 잠이 드는 부작용이 있으니 이것만 주의하면 된다.  


현대 뇌과학에서는 하루에 10분 정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게 몸에 좋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하루종일 각종 데이터 입력과 정보처리에 바쁜 뇌에게 휴식을 줘서 효율을 높인다는 얘기다. 

일종의 ‘뇌 조각모음’이다. 왠지 조각모음은 잠자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기도 한데. 


진심,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세상은 나 없이도 잘만 돌아가는데 뭔가 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보람 없는 인생이라 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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