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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sy Sep 11. 2019

니체는 죽었다

허무주의는 편리하게도 근거가 없어도 된다. 신을 믿으라고 한다면 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겠지만, 다 부질없고 허무하다는 것인데 그 이유를 댈 필요는 없다. 

     

내가 이룬 것이 하나도 없고, 앞으로 이룰 수 있는 것도 더 없을 것 같을 때.

혹은,

내가 이룬 것이 별 것 아니고 앞으로도 이룰 어떤 것도 무의미할 것이라고 생각이 들 때.

혹은,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도 더 이상 모르겠을 때.     


허무는 우리 곁에 다가온다. 허무가 가진 매력은 너무나 치명적이어서 한번 가까이하면 최소 몇날며칠은 그와 함께 보내야 한다.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몇 시간을 멍때려도 우울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날씨가 나쁘거나 비가 내리면 허무는 더 강력해진다. 

너는 아무 것도 아니다. 너의 인생은 무의미하다. 너는 왜 사는지, 이 단순한 질문에 조차 대답하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양하다. 


어느 천체물리학자가 있었다. 그녀는 지하 1300미터 연구시설에서 보이지 않는 물질 ‘암흑물질’을 탐구하겠다고 3년째 생활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물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하냐고? 그녀는 해맑게 웃는 표정으로 답했다.

“궁금하지 않아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난 그게 알고 싶을 뿐이에요.”

그녀는 왜 우주의 시작이 궁금했을까? 아마도 그녀의 질문은 나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무엇이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인지. 그게 뭔지만 안다면 이리 허무하지 않을 테니까.      


종교는 허무를 극복하는 강력한 수단을 제공한다. 모든 것의 근원에 神이 있으니까 허무는 애초에 배제된다. 신이 우리를 창조했고, 신의 말씀에 따라 살면 된다. 그러면 된다.


실제 인류는 꽤 오랜 시간 신에 의지해 허무를 극복하며 살아왔다. 때로 신은 인간에게 가혹했지만, 그마저도 신의 잘못이 아닌 신의 뜻을 잘못 이해한 인간의 탓이라 여기면서, 신은 그럴 리 없으니까, 신은 당연하게 善하니까.      


그런데 과학의 발전과 계몽주의, 근대화와 함께 신은 약해졌다. 신의 말씀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고 가끔은 터무니없었다. 18-19세기의 그 많은 천재들이 보기에 인간과 세계는 그런 식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꽤 오래 참았다. 

니체라는 이단아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기 전까지.      


니체가 열렬하게 ‘신의 죽음’을 선언하고 나니 보다 큰 문제가 생겼다. 어찌 보면 가장 곤란한 사람은 니체였다. 모든 허무주의를 처리해주던 신이 사라졌으니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 


니체는 인간의 힘으로 허무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죽을 때까지 소리 높여 외쳤지만 그것으로 부족했다. 허무는 너무 강력했고 악마와 같이 신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며 속삭였다.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부질없고 너희는 모두 가치 없는 존재니라.     

인간을 떠난 신은 비릿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니체는 죽었다.

자유로운 정신과 심장을 지닌 자, 초인(超人)이 되기 그리 쉬운가? 누구나 초인이 될 수 있다면 그가 왜 초인인가? 

스스로 운명을 창조하고 삶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그것도 열심히 살아가라는 니체의 조언은 ‘신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말보다 더 공허했다.      


알아먹지도 못할, 겨우 이딴 소리 할 거면서 성급하게 신의 퇴장을 종용한 니체를 원망하고 싶어도, 그는, 니체는 죽었다. 확실하고 무책임하게. - 수많은 다른 천재들은 ‘신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왜 가만히 있었겠나?    

  

‘나’의 존재에 대해 신이 보증을 서주지 않으니 인간은 ‘구조주의’라는 대체재를 찾았다. 레비스트로스, 자크 라캉, 미셀 푸코.. 사물의 의미는 개별로서가 아니라 전체 체계 안에서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서 규정된다는 말씀. 명쾌하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아니라 어느 회사의 직원이고, 누구의 친구이며, 어떤 사람의 애인이고, 또 누구의 자식이라는 뜻이다. 맞는 말이지만 이런 설명으로 만족할 수 있나? 


평생을 누군가의 ‘무엇’으로 살다가 어느 순간, ‘도대체 나는 뭔지?’라는, 허무에 빠진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계속해서 가족을 돌보고 회사를 다니며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실하게 살아가라고 한다면.. 깡패 같은 말씀이다.

     

당연히 구조주의는 그 구조부터 해체하라는 ‘해체주의’의 극심한 반발을 사게 된다. 차라리 우리가 믿어 왔던 것, 믿지 못하겠는 것 그 모든 것을 음절 하나까지 전부 해체해서 ‘확실한 것’ 하나만 찾아보자는 움직임. 그것이 해체주의다. 


말은 해체에 목적이 있지 않고 신을 대체할 수 있는 ‘어떤 확실 것’을 찾는 것이라고 했지만 한번 해체에 맛들인 비평가들은 형이상학을 비롯한 서양의 철학, 사상, 지식체계 일반을 전부 박살내 버렸다. 


근거를 의심하고, 말의 꼬투리를 잡고, 질기게 물고 늘어져서 ‘보여진 것’의 내면에 있는 뭔가를 찾으려다 보니 일상어조차 믿을 수 없게 돼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용서할 만한 것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다. 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자크 데리다     

뭔가 그럴 듯해 보이지만 실생활에 도움 되지 않는 말장난이다. 

그래서 뭐? 용서하라고, 하지 말라고?


폭풍 같았던 해체주의의 열풍은 양파의 껍질을 아무리 까도 진짜 양파를 찾는 데는 실패하는 것처럼 자신의 존립기반마저 해체하고 저 혼자 잠잠해졌다. 스스로를 해체해 버린 것이다.     


신이 그렇게 떠나고, 구조주의는 실패하고, 해체주의는 자진해산했다. 

허무하게, 허무가 승리한 것이다.     


이제 현대에 와서 허무주의는 치료하기 힘든 질병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현대에는 살기가 너무 빡빡해 허무를 느낄 틈이 많지 않다는 것. 

우리는 마치, 허무라는 질병에 대항해 ‘바쁨’이라는 백신을 접종하고 늘 허무에 대한 면역력을 높인 상태가 되었다. 먹고 살기도, 혹은 놀고 즐기기에도 바쁜 인생이라 허무할 새가 없다. 좋은 일이다.      


하루종일 한번도 자신을, 인생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허무는 찾아오지 않는다. 돌아보고 싶어도 그럴 여유가 없다면 역시 그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허무는 한 고비를 넘고 잠시 쉬는 틈을 타 찾아온다. 


일을 마치고 다음 일을 모색하는 사이, 더 높은 목표를 세우는 사이, 실패하고 좌절하는 사이, 다 놀고 뭘 할까 고민하는 사이, 그 짧은 방심하는 사이에 허무는 우리를 감염시킨다.     


역사적으로 허무와 정면 승부를 벌여왔던 계층은 지식인이다. 지식인들은 예술, 철학, 인문, 사상 등 인류의 필살기로 무장하고 허무에 대항해왔지만, 동시에 허무에 상시 노출돼 있는 고위험군에 속했다. 누구보다 자주 허무를 대하고, 허무를 느끼다보니 툭하면 그 병에 걸리는 것이다.


허무는 점염성이 높아 지식인을 자주 대하는 사람도 걸리기 쉽고 다른 병과 달리 병을 인식한 순간 급속도로 증세가 악화되기 때문에 특히 유의해야 한다. - 주변에 지식인이 있다면 멀리하자. 즐겁게 살고 있다면 더욱 가까이 하지 말자. 허무가 옮는다.      


다만, 허무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지식인기 때문에 허무를 치료할 방법 역시 지식인 제일 잘 안다고 하겠다. 그동안 꽤 많은 허무 치료법이 개발됐지만 대부분 일회용이거나 개개인에게만 효과가 있는 맞춤형이라 대량생산과 보급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역설적으로 허무는 낙천주의자들에 의해 쉽게 퇴치되기도 한다. 

‘난 허무하지 않아’ 

단순한 이 한마디에 허무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허무에는 애초에 근원이 없기 때문에 기초가 튼튼하지 않고 아주 사소한 것에도 자리를 내줄 수 있다.

재밌는 영화나 드라마를 찾아냈거나, 새로 사귄 사람이 있거나, 직장이 바뀌거나, 혹은 여행을 가기만 해도 허무는 쉽게 도망간다. 


그러나, 쉽게 떠나간 허무는 쉽게 돌아오는 단점이 있다. 가출한 여자친구처럼 몇 달만에 아무렇지 않게 돌아와 미소지으며 내게 묻는다. 

Do you miss me?     


비가 내렸을 뿐인데, 그저 구름이 낮게 드리웠을 뿐인데, 노을이 붉게 타오를 뿐인데, 허무가 돌아왔다. 더욱이 이번에는 쉽게 떠날 것 같지도 않다.     


책을 편다. 천재들이, 지식인들이 기록한 어떤 책을 읽으면, 어느 페이지에 이 악마를 몰아낼 방법이 적혀있을까? 

그리고 주문을 외운다. 당장 꺼져버리라고.

난 허무하고 싶지 않아. 허무하지 않아.      

소용없다. 나는 나약하다. 

날씨는 좋아지지 않는다. 꿈은 언제나 악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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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에드바르 뭉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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