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a Pill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sy May 31. 2024

책 모으는 남자의 변명, 안 읽을 결심

농담들 2 : 좀 웃겨야 할 것들

작가이신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적 우리집에는 작아도 늘 서재가 있었다.

당연히 모든 집에는 서재가 있다고 생각했고 책도 당연히 많다고 생각했다.

나는 공부를 잘 하는 아이였지만, 어머니는 교양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야이 무식한 아이야. 넌 어쩜 그렇게 무식하니?"

라는 말을 달고 사셨다. 별로 챙피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무식의 근거로 들었던 사례들이 납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겨우 고등학생인 나에게,

"사무엘 베케트를 몰라?"

"바게트? 빵?"

"고도를 기다리며를 쓴 작가 있잖아."

"고도가 뭔데? 저고도 비행 같은 거임?"


이런 나에게 원래 사무엘 베케트가 '고도'라는 이름을 어떻게 착안했는지를 알려주려 했으니...


(참고로 '고도'는 사무엘 베게트가 택시를 기다리는데 어떤 주정뱅이가 지나가며 '고도우' 이렇게 외치는 것을 들었다는.. 그게 지명인지, 사람 이름인지도 알 수 없는 채로... -전부 아들과 달리 유식하신 어머니의 설명)


어머니도 꽤나 답답했으리라..

 

그런 어느날 나는 장하게도 무식을 탈출하기로 마음 먹고, 어머니 서재의 모든 책을 읽어보리라 작정했다

그런데 어떤 순서로 읽어야 하나?

아무리 봐도 서재에 꽂혀있는 책들은 특별한 패턴이 없었다.


'어차피 다 읽을거 맨 윗줄 왼쪽부터 시작하자.'


그래서 뽑아든 첫 책이,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였다. 처음부터 제대로 걸린 것이다.

당연히 모르는 작가였다.


"과거는 바로 현재에요. 안 그래요? 미래이기도 하고. 우리는 그게 아니라고 하면서 애써 빠져나가려고 하지만 인생은 그걸 용납하지 않죠."


노벨문학상에, 퓰리쳐상을 4번이나 탄 작가를 모르다니 무식한 것이 맞았다. (나중 읽으니 이 좋은 것을, 쯧)


내용은 거의 기억 안난다. 4막으로 이뤄진 희곡이었는데, 아무리 읽어도 '여로'만 길고 밤이 오질 않았다는 것 밖에...

결국 밤(자정)이 오기 전에 난 포기했다. 내 독서 인생의 첫 실패였다.


"엄마, 이 책이 왜 유명한 거야? 지루해 죽겠드만. 어떻게 하룻밤 이야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바로 그 점이 그 책을 위대하게 만든 거야."


'미쳤다. 지루한게 위대하대.'


이렇게 무모하게 시작된 나의 위대한 도전은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다.

 

우선, 읽기는 다 읽었다. 그러나 엄청난 부작용을 남겼으니...  

 

첫째, 그 뒤 나는 서재에 있었던 책들은 모두 읽은 것으로 간주했다. 실제 물리적으로 넘기고 눈으로 보기는 했다. 이해도 못하고 기억도 안나서 그렇지. 하지만 '읽었다'는 사실이 정독할 기회를 날려버림으로써 사실상 읽어야 할 책을 못 읽은 셈이 됐다. 그래서 여전히 무식할수도..    


"이번에는 모비딕 같이 읽을까?"

"그거 읽었는데."

"돈키호테는?"

"세르반테스? 당연히 읽었지."


읽기는 개뿔. 제목만 아는 거지. 로시난테는 말이고, 산초는 좀 모자르고.


둘째, 이게 더 심각하다. 책에 둘러 쌓여 자라다 보니 책을 좋아하게 됐고, 책 모으는게 취미가 됐다.

책 많이 읽는게 뭐 심각하냐고? 착각하지 마시라. 책 모으는 것과 읽는 것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우표 모은다고 편지 많이 쓰나?


더욱이 책 모으는 취미는 제법 다양한 양태로 발전했다.

1. 충동구매: 전시된 책을 보다가 '이 책은 사야해!' 생각이 들면 산다. 이성은 남아있어서 현장 구매 않고 10% 할인되는 '바로드림'으로 산다.


2. 비싼 책 선호: 모으는 책이다 보니 페이퍼북 보다는 양장판, 속지에 그림이나 사진있는 것. 그리고 판형이 크고 멋진 책을 보면 구매 욕구가 넘친다.

3. 전집 선호: 문학전집의 경우 낱권은 폼나지 않는다. 쭈욱 10권 정도 줄지어 꽂혀 있어야 채색이 맞는다. 이점에서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민음사) 는 완전 내 취향이다.

4. 개봉 불가: 가뜩이나 구매한 책이 독서로 이어지는 빈도가 적은데, 비닐커버가 있는 경우 포장을 뜯지 않아 가독률을 더욱 저하시킨다.

5. 모양별 색깔별 정렬: 사실 이건 어머니 책임이 크다. 우리집 서재도 주제별이나 연도별 정리는 돼 있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발전시켜 미학적인 관점에서 책을 배열했을 뿐이다.  

이렇다 보니, 재정적 문제 외에도 또다른 문제를 야기시켰다.

그건 다름 아닌, 책 모양이 다를 경우, 같은 책을 또 산다는 것이다.

심지어 몇 년 지났을 때는 구매한 것을 잊어 먹고 완전 똑같은 책을 산 경우도 있다. -필요에 의해 앞뒤 안 재고 인터넷으로 책을 구매한 경우, 정말 읽고 싶어서. 진짜.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자성의 목소리가 커졌다.


'인간적으로 산 책을 또 사지는 말지?'  <<  이성적인 아내의 준엄한 경고


그래서 요즘은 읽고 싶은 책이 있을 경우 먼저 우리집 책꽂이를 먼저 살핀다.

그러나 말했다시피 특유의 배치문제로 인해 찾기는 만만치 않다. -배치 문제는 아내도 찬성했음. 그편이 예쁘다고. (참고로 아내는 LP판도 색깔 별로 정렬합니다.)


좋은 점도 있다.

읽고 싶은 책이 이미 집에 있을 경우,


"찾았다! 와. 이번에는 돈 굳었어! 나 잘했지?"

"응, 잘했어!"


짜릿한 기쁨을 느낀다.  


추신) 책은 읽을 능력이 될 때 읽을 만큼만 읽읍시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내 스마트폰의 '알림'을 지워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