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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 Aug 27. 2016

Intro

남자와 함께 할 때의 '나'에게 매료되어 있었어요

안녕. 난 로렐이예요. 당신의 영광이죠. 당신은 언제나 내 이름이 궁금하다고 말했지만 로렐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도 충분했어요. 이름을 알려줄 수는 없었어요. 누군가 이름을 부르면 의미가 생기기 때문이죠. 난 당신에게로 가서 꽃이 될 마음은 없으니까요.


이건 <당신의 그늘>이라고 하는 원고의 초고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마구 떠오르는 기억들이 아주 혼란스럽게 뒤섞일 것 같아요. 나는 부지런히 기록을 했어야 했을지도 몰라요. 당신과의 아주 사소하면서도 은밀한 일들을.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무기력하고 망가져있었죠.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쓰는 것도 읽는 것도, 심지어 생각하는 것조차도. 우울증은 아니었을 거예요. 따로 전문가의 진단을 받지 않았지만 식욕이나 성욕은 그대로였다는 점에서 생의 의지가 없이 서서히 스스로를 죽여 나가는 상태는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당황스러운가요? 느닷없는 글. 이 페이지는 폭로를 위한 것이 아니에요. 누군가를 다치게 하거나 부끄럽게 만들 생각도 없어요. 이건 오직 나의 기록이죠. 내가 무슨 말을 쓴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당신의 삶을 되짚어 볼 거란 기대도 들지 않아요. 이것은 나를 남기는 일이죠. 오히려 내가 부끄러워야죠. 당장이라도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 손목을 그어버리고 싶어질 정도로 괴로운 순간들이 튀어나올지도 몰라요. 물론 당신은 이것이 엄청난 과장이며 나는 스스로를 죽여 버릴 수 없을 만큼 나를 사랑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거예요.


하나의 당신을 이야기하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 수 없어요. 나조차도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니까요.


로렐, 로렐라이의 로렐이었을까요. 해변의 바위 위에서 아슬하게 몸을 드러내 놓고 노래를 부르며 뱃사람들을 홀리는 로렐라이. 당신은 내가 당신을 유혹했다고 말하겠죠. 앙큼한 계집. 남자의 밤을 아는 여자. 덫을 놓은 것을 부정하진 않겠어요. 아무나 걸려들길 바라는 덫은 아니었어요. 몇 번의 거름망을 거쳐야 덫에도 걸릴 수 있었죠. 그런 덕분에 나는 나를 과신했던 것 같아요. 내 촉을 확신했다고 해야 할까요. 너무나 뚜렷한, 그러나 관대한 자기 기준 덕분에 ‘좋은’ 남자가 아닌 ‘내 취향’의 남자들이 걸려드는 거였죠.


몸을 판 거냐구요? 어떤 뇌구조를 가지면 그런 질문이 떠오를 수 있는 건지 이해되지 않는군요. 나는 어떤 대가를 바라고 당신과 한 침대에 들어간 게 아니었잖아요. 그건 당신도 부정할 수 없을 거예요. 당신이 내게 줄 수 있는 건 없었잖아요. 그냥 우리는 뒤엉킨 것밖에 없어요. 다른 남자들과도 마찬가지였어요. 어떤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몸을 이용하는 것, 그런 건 전혀 없었어요.


여섯 살 때였나 엄마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어요. 나는 방에서 자고 있었고 엄마는 아주 화려하고 품위 있어 보이는 쟁반에 주스를 담아 나왔죠. 엄마에게 쟁반이란 허례였죠. 손님을 대접할 때 음료를 담은 컵만 건네는 걸 아주 끔찍하게 생각했어요. 심지어 딸인 나에게도 그렇게 했죠. 본인에게도 그렇게 해주길 바랐구요. 타인에게 하듯 그런 허례를 부리는 사이이길 원했나 봐요. 어쨌거나 그건 중요한 건 아니고 그 친구와 그런 얘기를 나누더라구요. 여자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루 종일 식당에서 설거지만 하는 걸 선택할 수도 있고, 웃음과 몸을 팔수도 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게 된다고 해도 후자의 일은 하지 못할 것이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아름다웠지만 그걸 이용하려고 시도하지 않았죠. 그랬다면 삶이 훨씬 수월했을 텐데 그러지 않았어요. 엄마의 딸인 나도 그랬죠. 차라리 다른 가치관은 같고 이것만 달랐다면 좋았을 텐데 이런 것만 엄마를 쏙 빼닮았더라구요.


나는 다른 보통의 여자들보다 남자들과 밤을 아니, 낮도 많이 보냈다고 할 수 있겠죠. 어째서인지 그게 좋았어요. ‘남자들이 좋았다.’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당신도 기뻐할 수 있을 텐데 미안하지만 나는 내가 제일 좋았어요. 남자와 함께 할 때의 ‘나’에게 매료되어 있었죠. 남자가 필요한 건 그 느낌 때문이었어요. 남자가 제공해줄 수 있는 건 나의 가치나, 나의 생계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오롯이 빠져들게 만들어 주는 이를테면 나라는 신에 도달하기 위한 접신 도구 같은 거랄 까나요. 어느 순간부터 내가 남자들에게 바라는 건 그런 것이었어요. 연애나 관계 이런 말들로 헌신하고 사랑하며 나 자신을 내가 만나는 남자로 증명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후의 일들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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