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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 Sep 08. 2016

B

이것은 반성문이다


강은 내게 이리 와줄 수 있냐고 물었다. 우리는 한 번 몸을 섞은 사이였고, 그가 연락한 시간은 심야 버스가 끊기기 30분 전이었다. 내가 그를 찾을 때 그가 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가 나를 찾는다면 나는 달려 나가야만 했다. 그래야 이 관계가 지속될 터였다. 그가 예쁘다고 했던 원피스에 얇은 코트를 걸치고 택시를 탔다. 그에게 가는 내내 통화를 하며 다정하게 길 안내를 해주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강의 집에 들어가기 전에 오피스텔 앞에서 함께 담배를 폈다. 그는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내게 건넸다. 강은 조금 취해 있었다. “넌 맨정신인데, 반칙이다.” 그러게. 취기가 올라올 때까지 술을 마신 뒤에야 내가 생각난 거잖아. 문이 열리면 우리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그는 나를 소파에 앉히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나를 올려 보았다. 코트를 벗기면서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원피스를 입고 왔다며 칭찬해 주었다. 춥지 않았냐며 차가워진 내 목을 쓰다듬다 브이자로 깊게 파인 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가슴을 만졌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강은 내 무릎에 입을 맞추었다. 무릎을 붙잡고 있던 손은 치마 안쪽으로 들어가 팬티를 끌어내렸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는 듯 엉덩이를 뭉갠 채 앉아 있기 보다는 팬티를 제대로 벗길 수 있게 몸을 움직였다. 이런 식으로 나를 다룬 게 강이 처음인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발목에 툭 털어진 조그마한 검정색 레이스 팬티. 내가 이미 젖어버렸다는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강은 오므리고 있던 내 다리를 지그시 벌렸다. 양쪽 발목은 팬티에 걸려 수갑을 찬 것처럼 움직임의 반경이 좁았다. 마름모 모양이 된 다리 사이로 강은 머리를 밀어 넣었다. 허벅지 안쪽이 간질거렸다. 다리 사이에 파묻힌 그의 머리를 쓰다듬긴 했지만 다리의 힘을 푸는 법을 몰라 잔뜩 긴장한 채로 버티고 있었다. “그러면 내가 힘들어.” 허벅지 안쪽 근육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강이 말했다. 뜻대로 몸이 풀리진 않았다. 아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런 건 상관없었다. 강은 어쨌든 어느 순간 나를 알몸으로 만들었다.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강은 매력적이었지만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몰라서 넘어간 게 아니었다. 위험하더라도 강의 예쁜 얼굴이 좋았다. 그와 자고 싶어 안달이 난 다른 여자들의 표정을 알고 있었기에 우월감 같은 것도 느끼고 싶었다. 섹스 자체보다는 그가 나를 유혹하는 과정의 즐거움. 그리고 그와 잤다는 성취감이 지금 상황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걸 제대로 즐기지도 못한 채 마음속의 시끄러운 경고음을 끊임없이 들어야했다.


그와 술은 마셨지만 밥은 먹지 않았다. Smashing Pumkins의 Landslide를 같이 들었지만 영화를 함께 보자는 제안은 거절했다. 그런 식으로 거리감을 두면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다. 내 감정을 모른 척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게 될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강은 와인과 재즈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나에게 자기 친구를 만나면 좋아할 것 같다고 말했다. 강은 기타를 치고 스쿠터를 탔고 면바지에 티셔츠 차림을 좋아했다. 강의 친구 윤은 성능 좋은 스피커를 가지고 있었고 베엠베를 끌었고 언제나 슈트를 갖춰 입었다. 


강이 직접 윤을 소개시켜준 건 아니었다. 우연히 모임에 참석했다가 윤을 만나게 되었고 그가 바로 강이 말했던 그 친구라는 걸 알게 되었다. 처음 만난 날 둘은 공통 화제인 강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윤은 내가 강을 좋아한다는 걸 눈치 챘지만 서슴없이 내 허벅지를 만졌다. 블루스하우스에서 Miles davis의 Round midnight을 신청하자 그는 Skeches of spain과 Bitches Brew 앨범은 꼭 들어보라고 말했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 일행들과 벽 하나 사이를 두고 있는 아슬한 공간에서 그는 내게 키스를 했다. 그걸 거부하지 않은 건 이미 나쁜 짓을 하고 있는데 더 나빠지면 뭐 어때 같은 자포자기였을까 아니면 윤과의 일을 알면 강도 조금은 쓰라린 기분을 느낄지 궁금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로든 비겁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 반성도 잠깐, 깊숙하게 파고든 윤의 혀에 집중하느라 생각들은 날아가 버렸다. 


그 정도 해프닝으로 끝날 밤이라고 생각했다. 다들 거나하게 취한 상태에서 택시를 잡고 있는데 윤은 같은 방향이라며 나를 자신의 택시에 태웠다. 도착한 곳은 신촌 어딘가의 모텔이었다. 그가 지갑을 잃어버린 것 같다며 허둥거려서 택시비와 모텔비는 내가 지불했다. 왜 우리가 이렇게 된 건지 영문도 모른 채 섹스를 했다. 윤은 몸을 교묘하게 쓰면서 결정적인 순간 몸을 빼는 나 때문에 애가 타서 엄청 흥분한 상태였고 취한 나는 그런 걸 의식하지도 못한 채 동물적으로 움직였다. 취한 상태에서도 몸은 방어적이었나 보다.


아침에 일어나니 내가 하고 있었던 목걸이며 팔찌며 다 끊어져 어딘가 사라져버린 상태였다. 전부 지난 애인이 선물했던 것이었다. 끝이라는 건 잃어버리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할 수 없지 뭐. 모텔 바닥을 기어 다니며 금붙이를 찾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와인을 몇 병이나 마신 덕분에 지독한 숙취를 느낄 수밖에 없었고 해장이 필요했다. 둘 다 퉁퉁 부은 얼굴로 모텔 앞에 있는 해장국집에서 말없이 콩나물국을 먹었다. 계산을 하고 나오면서 그에게 택시비까지 줬다. 


집에 돌아와 술병을 핑계로 하루 종일 누워있었다. 오후 늦게 윤에게서 연락이 왔다.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섹스의 비용을 당연히 남자가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이미 쓴 돈을 채워주겠다는 게 우습기도 해서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다. 어차피 그와 다시 볼 일이 있을까 싶었다. 처음 만난 남자와 그런 충동적인 섹스는 내 생애 처음 있는 일이었고 자괴감 비슷한 걸 느끼는 오후였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너무 좋아 내가 더 형편없게 느껴질 만큼. 


다음날 밤 윤이 찾아왔다. “넌 다른 여자애들이랑 다른 것 같아.”라고 말했다. 그 말이 우스웠지만 “그걸 이제야 알았다니 처음부터 그걸 알고 나랑 잤어야 하는 거 아니냐.” 응수했다. 윤은 한 잔 하자고 했다. 역삼동에 있는 와인바에서 윤은 꽤 비싼 와인을 주문했다. 내가 윤에게 쓴 돈의 두 배는 되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내가 그 정도 값어치는 한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꼈다. 속물근성을 긁어주는 동시에 나의 허영심도 자극하는 남자였다. 와인의 취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윤은 내게 몇 병의 와인을 선물했다. 


섹스로 이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당시의 나는 상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어떤 움직임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정작 내 몸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였다. 그래서 강과 윤, 이 두 사람과 자는 동안에 내가 뭘 느끼는지는 몰랐다. 마치 감정이나 감각을 차단해버린 사람처럼 그날들을 아무리 되짚어 봐도 내게 새겨진 느낌이 없었다. 물을 안은 것처럼 확 차올랐다 흔적도 없이 말라버린 것 같았다. 


그들을 만나면서 상대의 취향을 흡수했고, 내가 그동안 만나왔던 어린 남자들과는 다르게 능수능란하게 나를 이끄는 방식에 즐거움을 느꼈다. 그러나 대체 이들과 왜 섹스를 하고 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뭔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때는 자주, 많이 할 수 있어서 좋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이것은 반성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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