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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 Sep 08. 2016

이건 바로 내 이야기야

[酒導하다] 라 비 앙 로즈



평소에는 말이 많아지는 걸 경계하는 편이지만 이 이야기는 하지 않을 수 없겠는 걸. 물론 나한테만 신기한 일이고 나한테만 의미 있는 일이야, 그래도 세 시간 동안 너의 지난 여자친구 얘기를 들어줬으니 기브앤테이크라는 측면에서도 쏟아낼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다고 봐.


“이 바의 메뉴판은 볼 필요도 없어. 오늘 네가 마셔야 하는 술은 라 비 앙 로즈라는 칵테일이니까.”


이 칵테일의 유래는 2011년 추위가 일찍 찾아왔던 11월, 늦가을에 시작되지. 그 당시의 나는 폐렴에 걸려서 고생 중이었어. 각혈을 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구토와 설사를 반복하며 온몸이 고통 받는 시간을 보내며 세상과 격리되어 있었지. 증상이 나타나기 전까지 매일 같이 술을 마시던 나에게 혈중 알코올 농도가 줄어드는 건 몸이 아픈 것만큼이나 괴로운 일이었어. 술이 주는 그 알싸한 취기가 너무나도 필요했거든. 그래도 아파 죽는 건 싫었으니까 약을 먹고 병이 낫는 동안엔 알코올 섭취를 참아내며 그럭저럭 버티고 있었어. 3주 정도 지나니 몸도 괜찮아지기 시작했지.


단골 바 사장님은 매일 같이 나타나던 애가 안 보이니 안부가 궁금했었나봐. 시간이 되면 바에 놀러오라고 연락이 왔더라구. 그런 연통을 받고 누워만 있을 수는 없었지. 어머니가 항상 하신 말씀이 있어. “누군가 너를 찾을 때는 달려 나가. 불러줄 때 나가야해.” 기침도 잦아들었고 몸을 일으킬 기력도 생겼으니 가보자 싶더라구. 따뜻한 외투를 걸치고 목도리를 칭칭 감고 기어나갔지.


바 사장님이 나를 찾은 까닭은 자신이 새로 만든 칵테일의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어. 내가 글을 쓴다는 것이 네이밍과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단골 바의 칵테일 이름을 지을 수 있는 영광이 내게 주어졌는데 도전하지 않을 수 없었지.


부르고뉴 와인잔에 핸드릭스 진을 붓고 로즈티백을 우려내서 토닉워터와 섞고, 오이 조각과 작은 장미꽃 봉오리로 가니시를 한 칵테일. 장미차 때문인지 핸드릭스 특유의 강렬한 오이 향에 묻힐 뻔한 장미 향기가 좀 더 느껴지더군. 이런 저런 이름들이 불필요해 보였어. 가장 클리셰하고 가장 익숙하고 그러나 로즈로즈한 이름. “라 비 앙 로즈 어때요?” 인생은 장밋빛, 결코 그럴 리 없다는 걸 알지만 이 술 한 모금에 잠깐 착각이라도 할 수 있다면 좋은 거 아닌가.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 이름을 호들갑스럽게 마음에 들어 했지. 당연한 거 아니겠어. 물론 내가 만든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이름을 연결시킨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지. 어깨가 뿜뿜 치솟는 느낌이 들었어. 오랜만에 마신 한 모금의 칵테일 덕분이기도 했구. “라 비 앙 로즈” 칵테일 이름이 결정된 걸 기뻐하며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를 듣는 것도 너무나 뻔한 수순이었지.


그림 . ㄱㅎㅇ



이 정도 이야기로 그에게 이 칵테일을 마시도록 종용하는 것은 뻔뻔하지 않은가. 좀 더 들려줄 이야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미사일 폭격처럼 내게 날아왔다.  


별 생각 없이 고른 책이었다. <타워>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렇다고 성실한 독서가도 아니었기에 그만 잊고 지냈다. 트위터에서 본 노란색 발랄한 표지와 제목이 흥미로워서 장바구니에 담아놓은 책이었다. 배명훈의 <맛집 폭격>. 책의 시작부터 리듬감이 넘쳐 신나게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서브 여주인공의 이름이 현정이라는 걸 발견했을 때는 놀라고 신기했다. 흔한 이름, 어릴 때부터 한 반에 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가 한 명, 많게는 세 명도 있던 이름이었다. 그런 게 내 이름이라니! 꽤 오랫동안 그 이름을 싫어했다. 하지만 이름이 그토록 흔한 덕분에 디지털 시대에 온라인상에서 누군가 나를 찾는 건 힘든 일이 되었다. 실명을 가지고도 익명성이 어느 정도 획득될 수 있는 이름이라니, 그 편리함 덕분에 내 이름이 좋아지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이름을 무척이나 잘 쓴 소설 속에서 보게 되다니 개인적으로는 감격의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상호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알 수 있는 맛집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나의 단골 바에 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는 게 아닌가. 에? 과장된 감탄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커피를 마시던 중에 발견한 페이지라 카페인이 그 흥분을 더욱 고조시켜 주었다. 여기, 내 단골 바 얘기잖아.


그 정도에서 끝났다면 내가 라 비 앙 로즈를 그에게 마시라고 권하지도 않았을 테지. 내가 이름을 지은 그 칵테일에 대해 남자주인공이 설명을 하는 게 아닌가.

"라비앙로즈는 막 돌아다니고 싶은 맛인 것 같아요. 빙글빙글 돌면서 이리저리 팔랑팔랑. 아무 데도 안 부딪치면서요."

하아. 이거 뭐야. 엄청나잖아. 폴짝폴짝 뛰고 싶은 기분이라는 건 이럴 때 드는 게 아닐까. 소리치고 싶더라구. “이보세요. 사람들아. 이 책 좀 읽어봐. <맛집 폭격>. 내 이름이 나오는데 내가 이름을 붙인 칵테일도 소개되어 있다구.”


아주 열심히 성의 없이 그린 거라고 강조해주었습니다. 얼음도 오이도 없이. 그래도 라 비 앙 로즈라니까요.



누군가에게 마가리타를 권하며 총기 오발 사고로 첫사랑이자 애인을 잃은 바텐더가 그녀를 그리워하며 만든 칵테일이라고 말해주는 것보다 훨씬 더 근사한 이야기잖아. 이건 바로 내 이야기라고. 그게 라비앙로즈. 자, 이제 그 칵테일을 마셔봐.


가끔은 이렇게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인생이 장밋빛으로 물들 때가 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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