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은 싸움으로 피를 흘리는 것을 그만둬라. 남자에겐 정말로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 될 순간이 분명 온다. 그때까지는 술이나 마시며 덧없는 인생을 즐기는 거다.”
기차 안에서 벌어진 싸움을 중재하면서 가지고 있던 술을 내민 정체불명의 망토를 두른 남자, 싸움을 벌이던 사내들은 그 술을 받아 마시고 취해버린다. 철이도 마셔보겠다고 조르더니 한 모금에 헤롱거린다. 그 모습을 보고 남자가 이 술은 축제의 별에서 가져온 우주에서 가장 독하기로 유명한 포도주라서 어린 꼬마애가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한다. 메텔은 자기도 마셔봐도 되냐고 청한다. 그러자 남자는 “저 애처럼 되어도 난 책임 못 져!”라고 반말을 하며 술을 건넨다. 메텔은 별 거 아니라는 듯 병째로 다 마셔버린다. 한 방울도 남지 않은 술병과 멀쩡하게 서있는 메텔을 번갈아보던 남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라며 존대의 말을 남기고 물러난다.
<은하철도 999>의 ‘시간성의 해적’에 등장하는 이 에피소드를 보는데 통쾌함이 느껴졌다. 1980년대의 작품이지만 독한 술을 마시는 걸로 자부심을 품는 남자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주는 메텔 언니의 알코올 분해 효소에 건배를!
그림 ㄱ ㅎ ㅇ
<은하철도 999>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오늘 소개하려는 은하고원 맥주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은하고원 맥주는 작가 미야자와 겐지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고향인 이와테현에서 1996년부터 생산하기 시작했다. 미야자와 겐지는 가난하고 아버지가 없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받는 한 소년 조반니가 은하수 축제가 열리는 밤,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뒷동산에 올라갔다가 은하철도가 나타나 그것을 타고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하는 <은하철도의 밤>이라는 신비한 소설을 썼다. 그 소설은 <은하철도 999>의 모티브가 되었다.
은하고원 맥주가 양조되는 이와테현의 사와우치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폭설이 잦지만 맑은 광천수가 풍부했다. 연평균 기온이 9℃라 맥주의 본고장인 독일 바이에른 뮌헨과 비슷한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특장점을 살려 사와우치 마을 살리기 사업의 일환으로 맥주 양조를 시작하게 되었다. 정통 독일식 맥주를 만들어내기 위해 1516년 바이에른의 빌헬름 4세가 선포한 맥주순수령에 따라 맥아, 홉, 물만으로 만들고 있으며, 맥아와 홉 모두 독일산을 사용하고 있다.
은하고원 맥주는 푸른색 병에 은색 라벨이 붙어있고 병과 같은 푸른색으로 로고와 상표명을 표현하고 있는데 <은하철도의 밤>처럼 신비하면서도 아름답다. 2004년에는 <은하철도 999>의 메텔과 은하철도가 그려진 라벨을 붙여 은하철도 맥주를 한정 판매하기도 했다.
태양이 아직 기울지 않고 중천에 떠서 쨍한 이른 오후에 가볍게 마시기 좋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시원하게 톡 하는 느낌보다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 때문에 처지기 쉬운 오후에 기분 전환을 시켜주는 술이랄까. 그래서 일본인 셰프가 팟타이를 만드는 날, 점심시간에 맞춰 맥주를 들고 방문했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내가 들고 있는 은하고원 맥주를 보더니 하이톤의 탄성을 지르며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맥주! 일본에서는 그것만 마신다. 그러나 한국에선 너무 비싸!’를 외쳤다. (일본에 가면 은하고원 맥주를 싸게 잔뜩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부러웠다.) 숙주와 갖은 야채, 마늘과 볶아서 나온 새콤달콤한 팟타이는 역시나 은하고원 맥주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끝 맛이 깔끔해서인지 음식과 함께 마실 때 전체적으로 맛을 정리해주는 느낌이었다. 고기나 튀겨서 기름기가 많은 무거운 음식보다는 샐러드나 샌드위치 같은 음식과도 잘 어울렸다. 빵이랑 마셔도 무난했다.
은하고원 맥주는 50% 이상의 밀과 보리를 맥아 사용하고, 효모를 거르지 않은 헤페바이젠이라 탁해 보이는 호박색을 띄고 있다. 거품은 많이 나지 않으며 금방 사라진다. 거품으로 탄산을 지켜냄으로써 청량감을 유지시켜야 하는 라거가 아니라서 거품이 오래 유지되지 않는 것이 문제 될 건 없었다.
탄산이 적어 부드럽고 바나나향과 과일 그리고 허브향 덕분에 달콤하게 취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다른 헤페바이젠 맥주보다는 가벼운 느낌이 있다. 효모를 거르지 않았기 때문에 효모 향이 강하지만 홉도 진해서 쓴맛이 강한 에일과는 다르기 때문에 술을 잘 못 마시만 맛있는 걸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추천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