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酒導하다] 1664 블랑
“저희집은 호가든 생이 맛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구? 도대체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이 가게에서 제일 맛있는 맥주는 무엇인가요?’라고 물었던가? 아니다. 나는 1664 블랑을 달라고 했을 뿐이다.
“1664 블랑을 드실 거라면 저희집 호가든 생을 드시는 게 더 좋아요.”
이 대화는 어째서 기승전호가든 생이어야 하는가? 나는 분명 ‘괜찮습니다, 1664 블랑을 주세요.’라고 대답했다.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내가 원하는 것을 말했다. 그게 귀에 닿지 않는 것인가? 내 말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겠다는 것인가?
“맥주 맛을 아신다면 인위적인 블랑보다는 호가든 생을 드셔야죠.”
맥주 디스펜서와 노즐 청소를 열심히 하셔서 자부심이 대단한 건지, 생맥주의 신선도 유지를 위해 3일 안에 케그를 비우겠다는 의지가 강렬해서인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지만 가게의 추천이라고 해도 강압에 가까운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하는 사람에게 원하는 정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막무가내로 호가든 생을 들이밀다니.
이쯤 되면 호가든 생은 이 가게의 자랑이라기 보단 아집과 교만이라고 표현해야하지 않을까? 도대체 왜 고객의 니즈를 무시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즐거운 기분으로 영혼을 정화시켜주는 소울 푸드인 감자튀김과 맛있는 맥주를 먹으려던 나의 금요일 밤이 망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맥주 자체만을 시원하게 꿀꺽꿀꺽 마실 때는 라거 스타일을 선호하지만 기름진 음식과 곁들여서 먹을 때는 상면 발효된 에일 맥주를 즐기는 편이고 그 중에서도 밀맥을 좋아해서 호가든은 오래전부터 즐겨 마시던 맥주였다. 물론 벨기에산 이었을 때의 이야기다.
2007년 9월부터 오비맥주에서 OEM(주문자상표부착)으로 생산 판매하면서 맛의 변화가 느껴져 찾지 않는 맥주였다. 제조비법은 동일하다고는 하지만 어째서인지 한국판 호가든은 내게 신맛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커피든 와인이든 맥주든 산미에 대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라 당연히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오비에서 생산한 뒤론 호가든이 아니라 오가든이라고 불리는 걸 보면 나만 맛의 차이를 느끼는 건 아니었다.
“호가든 안 좋아하신다면서 블랑은 왜 드세요?”
Oh shit, What the fuck! 이건 분명히 선을 넘었다. 이쯤되면 싸우자는 거 아닌가! 사장님! 저는 그저 맥주를 마시러 온 것뿐이고 구구절절 제 맥주 취향에 대해서 사장님께 설명 드리고 싶지 않아요. 적어도 취향의 존중 같은 기본 태도를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구요.
이건 설명충보다 더 나빴다. 바에 혼자 술을 마시러 가면 옆에 앉아 있던 남자들이 지금 이순간의 공통 화제인 술을 핑계로 말을 걸곤 한다. 술에 대해 기술적으로 지식을 쌓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나 많이 알지? 감탄해줘. 칭찬해줘. 좋아해줘.’ 와 같은 자의식 뿜뿜이라서 감동도 재미도 없다. 인문 사회 과학 경제 문학 예술 다양한 분야의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술을 엮어 들어가면 그나마 들어줄 만은 하다. 종종 내가 몰랐던 얘기를 하기도 하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귀를 열어줬다고 내가 마실 술에 대해 간섭할 권리라고 생긴 것처럼 굴기 시작하면 짜증이 치솟기 시작한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
이 가게의 사장은 호가든에 대해 나에게 뭔가 새로운 지적 즐거움을 안겨주면서 설득하는 것도 아니고, 감각과 취향의 영역에서 호가든이 블랑보다 낫다고 말하는 것이 너무나 우스웠다.
“사장님, 블랑 역시 호가든과 같은 에일 맥주이고 밀 맥주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블랑의 향이 인위적이라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오늘은 벨지안이 아니라 파리지앵이 되고 싶은 날이거든요! 오스카 와일드가 이런 말을 했어요. 대부분의 여자들은 너무나 인위적이라 예술에 대한 감각이 없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너무나 자연적이라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 없다. 저는 맥주를 마시면서도 미와 추의 개념이 뒤섞인 예술을 하기 보다는 아름다움만을 추구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제발 제게 1664 블랑을 가져다주시겠어요?”
“닥치고, 당장 1664 블랑이나 가져온 뒤 꺼져.”라는 말 대신 미소를 잃지 않고 상냥하게 말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전혀 모르겠지! 누군가는 잘생긴 사장님이 다가와 추천해주고 말을 걸어주는 걸 원할지 몰라도 저는 아니거든요. 저쪽 가서 하세요. 저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