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밤
한 남자와 섹스가 끝난 뒤 하나만 사용한 침대에 누워 아직 흩트러지지 않은 다른 침대를 보며 이 밤에 달려와 줄 다음 남자를 기다리는 시간이 앞선 섹스보다 나를 더 흥분시켰다.
‘저기 반짝 반짝이는 이 도시, 뿌연 회색 하늘 밑 눈이 부신 잠들지 못하는 이 도시의 이 밤’ 이효리가 자신이 떠나온 서울에 대한 애증 어린 곡을 발표했을 때 나 역시 서울을 떠나 저 멀리에 살고 있었다. 일 때문에 두어 달에 한 번 정도는 서울을 방문했지만 머물 집도 처분했기에 호텔에 묵으며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섹스를 했다.
나는 항상 트윈 베드 룸을 선택했다. 한때는 연애지상주의자였으며 퀸 사이즈 침대에 한 남자와 눕지 않으면 지독한 불면의 밤을 보내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한 침대에서 남자와 뒹굴 수는 있어도 같이 잠들지는 못했다. 게다가 오랜만에 온 서울에서 보는 밤을 한 남자에게만 쓸 수는 없었다. 업무 일정만큼이나 섹스 할 수 있는 상대와의 시간표를 잘 짜는 것이 중요했다. 사랑과 연애, 섹스를 효율적으로 분리하게 되면서 그 셋 중 섹스는 서툴고 어려웠던 일에서 가장 쉬운 일이 되었다. 덧붙여 이왕이면 다다익선이었다.
거대하고 화려하며 그만큼 쓸쓸한 밤의 도시 서울은 어느 도시보다 안락하고 손쉽게 타인과 밤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 벨을 누른 첫 번째 남자는 엄격한 부모님에게서 경제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독립하지 못해 외박은 꿈꾸지 못하는 대학원생. 섹스를 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려보내기 좋은 상대였다. 그렇게 하나만 사용한 침대에 누워 아직 흩트러지지 않은 다른 침대를 보며 이 밤에 달려와 줄 다음 남자를 기다리는 시간이 앞선 섹스보다 나를 더 흥분시켰다.
호텔 로비 라운지 바에서 만나 싱글 몰트 위스키를 한 잔씩 스트레이트로 마시고 방으로 들어온 두 번째 남자는 몸을 섞고 난 뒤 이런 저런 재미도 없는 이야기를 두서없이 하기 시작했다. 잠깐 잠들었다가 또 한 번 하기를 원하기도 했다. 남은 밤을 오롯이 나와 보내고 싶어 했다. 이런 유형의 남자는 흡연을 핑계 삼아 로비로 끌고 내려와야 했다. 이 남자가 뭉그적거리며 침대에 머물고 싶어하는 이유는 집에 가기 귀찮기 때문이거나, 섹스만 하고 나를 홀로 남겨두고 매정하게 떠나는 역할을 맡기 싫은 것뿐이었다, 그건 나를 위해서라기 보단 자신이 한 섹스가 공허한 사정이 아니길 바라는 행동에 가까웠다. 원하는 것은 단지 섹스일 뿐이면서 유사 연애를 하듯 다정한 척 하는 남자는 경계할 수밖에 없다. 공허한 게 나쁜 건 아니지 않은가? 꽉꽉 들어차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비어 있으면 비어 있는 거지 의미가 있는 척 하면 오히려 문제가 생긴다.
원하는 것이 애정이 아니라 섹스라면 그 섹스가 안전하고 좋을 것이라는 증명만 하면 된다. 염세적이고 허무해 보인다고? 나는 그저 실용주의일 뿐이었다. 섹스를 하면서 위로를 받는 건 섹스 자체가 힐링이기 때문이지, 내가 힐러로서 작동하길 원하지 않았다. 몸은 헤플지언정 나의 상냥함은 낭비하지 않았다. 섹스가 끝나면 옷을 챙겨 입고 돌아간다. 그것이 상대가 지켜주길 바라는 규칙이었다. 하룻밤이면 몇 명과 몇 번의 섹스를 할 수 있는 줄 아는가! 그 밤을 독점하려 드는 것은 오랜만에 이 도시를 찾은 나를 배려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밤이 깊어 새벽으로 넘어갈 때쯤 프론트에서 방문자를 확인하는 전화가 왔다. 이 시간까지 야근을 해도 섹스 할 기력은 남겨놓은 귀여운 남자였다. 그가 하루의 피로를 물로 씻어내고, 물의 생명력을 받아 충전을 하는 동안 격렬했던 앞선 섹스로 몸과 정신이 각성되어 버린 나는 그를 기다리며 읽고 있던 책을 이어나갔다. 예전부터 정신 없이 바쁜 일정의 틈을 타 몸을 섞어야 했기 때문에 본격 섹스 모드를 가동하기 전까지 둘 다 일을 손에서 놓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것이 우리에겐 전희가 되곤 했다. 둘만의 공간에서 서로를 의식하지 않으며 자신의 일에 집중하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몸을 섞는다는 목표 의식이 상대보다 높은 내가 대부분 지고 마는 게임이었고 결국 하게 될 것은 섹스임을 알기에 다른 일에 집중하면서도 몸은 쉽게 달아올랐다.
그날 읽고 있던 책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었고 섹스를 잊고 빠져버릴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었다.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민소매 셔츠를 입고 모로 누워 책을 보고 있으니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던 그는 내 옆에 앉아 가슴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가슴을 움켜쥐었는데도 내가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유두를 살짝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큰 손을 펼쳐 양쪽 유두를 동시에 문질렀다. 내가 좋아하는 방식을 제대로 익힌 남자의 동작이었다. 옷 밖으로 가슴이 드러나고 그의 손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몸에 닿는 뜨거운 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책을 덮을 순 없었다. 그는 내게 키스를 하거나 책을 빼앗는 방식으로 방해 공작을 펼치진 않았다. 이미 나는 곧바로 그를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젖어있었고 탄성을 터져나올 만큼 기분이 좋아졌지만 소리를 삼킬 수도 있다는 걸 그가 알길 바랐다. 이런 오기를 그 역시 승부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막 읽고 있던 장에는 ‘일종의 고장은 일탈일지도 모른다.’고 서술된 부분이 있었고 그는 능청스럽게 ‘어디가 고장 난 건가?’ 하며 유두를 깨물었다. 참을만한 고통이었고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책장을 넘겼다. 그는 전략을 바꿨다. 방해를 위한 어루만짐이 아닌 책을 읽어 내려가는 호흡에 맞춰 내 몸을 부드럽게 건드렸다. 자세를 바꿔 엎드린 내 몸 위에 몸을 포개고 누워 한껏 단단해진 자신을 내 허벅지에 밀착시켰다. 완벽하게 준비된 단단한 촉감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영리함이라니 입 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읽고 있던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뤄 버리게 만드는 집요하면서도 부드러운 욕망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서 보내는 밤의 끝자락을 마무리하기엔 더할 나위 없었고, 계획했던 것 이상의 즐거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