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코어 로맨스의 시작
상대의 요구에 복종하는 것임에도 아이러니하게 자유로워진 기분이 들었다.
남자가 가지고 있는 힘은 내가 그에게 기꺼이 준 것이었다.
엄지와 검지, 단 두 손가락만을 사용했을 뿐이었다. 남자가 나의 유두를 살짝 잡고 비틀었을 때 지금까지 섹스를 하며 내 몸에 맞게 남자들을 교정하는 데 소모한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 과정에서 재미를 느끼기도 했고 나름의 의미도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이 지속되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모두 지워야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삭제 버튼을 누를 것이다. ‘좀 더 세게’, ‘아니 그건 너무 아프잖아’ 같은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남자의 손가락은 언제 부드러워야 하는지, 어떤 순간 힘을 줘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나를 만지는 강도가 잘 조절되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황홀해질 수 있다니 만족스러움에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16세기 화가 브론치노가 그린 <미와 사랑의 알레고리>를 보았을 때 비너스와 큐피드의 나체, 그 자체에 직관적으로 본능이 반응했다. 불편해 보일 정도로 뒤틀린 상태로 서로를 포옹하고 있는 둘의 자세는 기묘하게 음탕했다. 비너스의 가슴과 머리를 감싸고 있는 큐피드의 양 손끝은 그것이 내 몸에 닿았다고 상상하기만 해도 찌릿해질 만큼 공감각적으로 에로틱했다. 남자가 내 몸을 만질 때 큐피드의 손이 실체화된 것 같았다. 큐피드가 검지와 중지 사이에 비너스의 유두를 끼운 채 가슴을 애무하는 장면이 그대로 재현되자 60조나 된다는 몸 속의 세포가 모조리 새롭게 각성한 것 같았다. 남자의 손이 닿는 내 몸의 구석구석이 들떠 올랐다.
정신이 몸에 붙어있을 수 없을 만큼 나를 녹신녹신하게 만든 남자는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볼을 감싸고 내려와 내 턱에서 움직임을 멈추더니 검지 손가락을 이용해 턱을 들어올렸다. 남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내 강아지, 말을 잘 들어야지?”라고 말했다. 똑바로 쳐다본 남자의 눈은 야하다는 표현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고 어떤 거부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위엄 같은 게 어려있었다.
그렇다 한들 평소대로라면 그 말에 ‘응? 뭐라고? 강아지?’ 같은 반발심이 나의 눈빛과 굳은 표정에서 드러났을 것이다. 지배와 복종으로 구성된 섹스에 거부감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호기심이 발동되는 영역이었다. 그러나 남성이 관계를 지배하는 플레이에는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여자를 발정 난 암캐 취급하며 자신의 성욕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만 여기면서 그것이 BSDM(결박, 구속, 지배, 복종, 사디즘, 마조히즘을 뜻하는 약어) 플레이라고 여기는 남자는 결코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보잘것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걸 감추기 위해 여자 앞에서 오만해지는 남자들은 너무나 위험했다. 특히 성 엄숙주의와 잘못된 성교육, 성의식이 미묘하게 뒤틀려있는 한국 사회에서 남성이 지배하고 통제하는 섹스는 여성에게 해볼만한 좋은 경험이 되긴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이 남자의 시도는 의외의 면모를 드러낸 것이었다. 전형적이지도 않았다. 이런 플레이를 콘셉트로 촬영한 사진을 보면 슈트를 잘 갖춰 입은 남자와 헐벗은 혹은 관능적인 란제리 차림의 여자가 등장한다. 경제적인 성공이나 부유함이 마치 여성을 지배할 수 있는 조건처럼 그려지고 젊고 아름다운 여성은 돈에 굴복해서 기꺼이 성적 대상화가 된다는 인상을 준다. 남자는 나보다 여덟 살이나 어렸다. 외국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와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자기소개서를 쓰는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긴 했지만 내게 짜증을 내거나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데이트를 하는 내내 혹여나 어린 자신이 미흡해서 내게 실수라도 할까 봐 조심스럽다 못해 조신했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해서 기분 상하게 만들진 않을까 결정이 필요한 일은 언제나 상의를 했다. 예쁜 말을 골라서 썼고 과하지 않은 애교로 관계에 달콤함을 첨가할 줄도 알았다. 무해해 보이는 얼굴은 상냥했다. 그런 모든 태도에서 자신의 남성성이 혹시나 훼손될까 봐 두려워하거나 불편해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런 기질을 바탕으로 한 가학적이고 지배적인 욕구라면 안전하게 느껴졌다.
남자는 내가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었다. 자신의 욕구를 이기적으로 강요하는 게 아니었다 거절 당할 수도 있지만 나라서 자신의 그런 욕구를 드러내 보여도 괜찮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시도해 본 것이었다. 내 직관은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남자에게 휩쓸려도 좋을 것 같았다.
두 손은 주먹을 쥐고 강아지의 앞발처럼 만든 뒤 주인의 관심을 간절히 바라며 강아지처럼 낑낑거렸다. 내가 동의를 표하는 순간, 남자는 밀어붙였다. 뒤엉켜있던 몸을 빼 둘 사이에 거리를 만들더니 자신에게 기어오라고 명령했다.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상대의 요구에 복종하는 것임에도 아이러니하게 자유로워진 기분이 들었다. 남자가 가지고 있는 힘은 내가 그에게 기꺼이 준 것이었다. 내 의지로 이 순간의 쾌락이 유지되는 것이었다. 이 관계를 실제로 지배하는 힘은 내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남자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하든 내가 훼손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남자에게 네 발로 기어 다가가자 그는 머리부터 엉덩이까지 척추를 따라 내 몸을 몇 번 쓰다듬더니 갑자기 미끈거리는 내 몸의 틈새로 자신의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여전히 강아지처럼 엎드린 자세라는 점에서 밀려오는 부끄러운 감정과 동시에 남자의 손가락이 만들어내는 쾌감에 몸이 자연스럽게 뒤틀렸다. 강아지 자세가 무너지려고 할 때마다 남자는 다른 손으로 내 엉덩이를 찰싹 하고 때렸다. 그것은 단지 우리 둘의 시작일 뿐이었다.